2012년 6월 21일 목요일

‎[BK칼럼] 아킬레스와 알렉산더

마키아벨리는 『군주론(On Prince)』에서 재미있는 비유를 들고 있다. 마치 사수(射手)가 멀리 있는 과녁을 맞추기 위해 과녁보다 약간 높은 곳을 조준하고 시위를 당기는 것처럼, 위인들도 대개 자신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을 삶의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그 예로 들고 있는 것이 알렉산더는 아킬레스를 모범으로 삼았고 카이사르는 알렉산더를 모범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플루타르크 영웅전(Plutarch's Lives)』을 보면 알렉산더는 먼 원정길에서도 항상 호머의 『일리아드(Iliad)』를 끼고 탐독하며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스를 흠모했다. 또한 대기만성형인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 중에 알렉산더의 전기를 읽으며 젊은 나이에 대(大)제국을 건설한 그와 자신을 비교하여 눈물을 흘렸다.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은 한니발이나 카이사르의 전쟁을 읽고 또 읽을 것을 강조했고, 히틀러는 독일민족의 영웅인 프리드리히 대왕이나 비스마르크를 흠모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인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이는 위대한 행위를 통해 역사 속에서 불멸의 존재로 그 이름을 남긴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불멸의 명예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트로이 전쟁에 참가한 아킬레스가 그렇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수천 년이 흐른 지금까지 우리에게 기억되는 알렉산더가 그렇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에서 종교인과 철학자들이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영원성'을 추구한 반면 정치인이자 군인이었던 고대의 시민들은 활동적 삶(vita activa)을 통해 시간 속에서 영속하고 세계와 함께 죽지 않는 '불멸성'을 추구했다고 말한다. 

진리를 추구했으나 단 한편의 글도 남기지 않은 소크라테스와 달리 정치인이자 군인이었던 페리클레스는 비록 펠로폰네소스전쟁 중 쓰러졌지만 그의 30년 치세(治世)가 이룩한 아테네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기억되며 깊은 영감을 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어느 샌가 이러한 '불멸성' 즉 명예에 대한 추구는 헛되고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되고 오늘날의 현대인에게는 '돈'과 '건강'에 대한 욕망만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작년에 개봉했던 두 편의 영화 『트로이(Troy)』와 『알렉산더(Alexander)』는 바로 이러한 고대인들의 잊혀진 고민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영화였다. 

시대적 배경과 박진감 넘치는 고대의 전투장면을 재현한 것 뿐 아니라 두 영화는 모두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불멸의 명예'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알렉산더』에는 『트로이』처럼 21세기 헐리웃 영화에 친숙한 관객들을 배려하는 친절함이 없었다. 그래서 항간의 지루하다는 혹평이 이어지는 것이다. 사실 『트로이』는 너무나 친절한 영화였다. 

아킬레스와 동성애 관계라는 혐의를 받기에 충분한 파트로클로스도 사촌동생 쯤으로 거부감 없게 적당히 얼버무리고, 다소 생뚱 맞을 수 있는 아킬레스의 최후를 사랑하는 브리세이스를 구하기 위해 활약하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는 것으로 각색한 것이라거나, (원래 『일리아드』에서는 트로이목마 작전 이전에 암살됨) 신들의 개입이라는 신화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오직 인간들의 이야기로 풀어낸 점 등이 오늘날의 관객들을 위한 최대한의 배려였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알랙산더』에는 그런 배려가 하나도 없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알랙산더 편이 거의 그대로 영화화되어 있는 듯 싶다. 그래서 오늘날의 관객들이 보기에 알랙산더는 정말 생뚱 맞은 인간이 되었다. 올리버 스톤 감독이 프톨레마이오스를 통해 알랙산더의 입장을 옹호하려고 지루한 나레이션을 잔뜩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관객들이 그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아킬레스와 파트로클로스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헤파이스쳔과의 동성애 비슷한 관계도 거부감을 일으키고 이해할 수 없는 원주민 부족과의 결혼을 강행하거나 다리우스 왕을 쓰러뜨린 이후에도 많은 병사들의 반대와 파업을 무릅쓰고 인도까지 무리한 원정을 감행하는 것도 그렇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는 '도대체 알랙산더가 그런 무모한 원정을 하는 이유가 뭔가'를 가르쳐 달라고 감독을 힐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아킬레스와 알렉산더는 고대인들이 추구했던 불멸의 명예를 온몸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같은 인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관객들이 우회적으로 표현된 아킬레스에 열광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진 알랙산더에게 공감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나 아렌트가 지적하고 있는 고대인들의 '불멸성'과 명예에 대한 갈망이 근대 이후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낯선 욕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최근에 일고 있는 '웰빙(Well-being)' 열풍을 생각해보자. 본래 서구 선진국에서 자본주의 질서가 강요하는 무한경쟁의 도가니에서 일탈하여 전원의 자연친화적이고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웰빙의 본래 취지는 사라진 채 그저 일찍 죽지 않기 위한 보신주의로 전락하고 있다. 몸에 좋은 거라면 사족을 못쓰는 그런 천박한 경향이라면 웰빙이라는 멋진 말로 포장하기 이전부터 한국사회에는 쭈욱 존재해왔다. 

아킬레스는 자신이 죽을 것이란 예언을 듣고서도 1000년 후에도 기억되기 위해 트로이 전쟁에 참가했고 알랙산더는 스스로의 생명을 단축하는 무리한 원정을 감행하며 전세계를 일주하고자 했다. 과연 웰빙 보양식과 반신욕으로 100살까지 건강하게 사는 삶과 33세에 요절했지만 2000년이 넘게 기억되는 불멸의 삶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더구나 오늘날의 우리는 그러한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론 불멸의 명예를 향한 알렉산더의 열정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나 역시 그의 원정에 동행했더라면 대다수의 부하들처럼 왕에게 회군을 독촉하는 입장에 서지 않았을까 싶다. 무수한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불멸의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의 군인과 정치인에게 필요한 덕목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명예로운 삶이란 무엇인가? 과연 우리는 활동적 삶과 창조적 행위, 그를 통한 불멸의 명예를 지향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약간 높이 쏜 화살의 과녁 같은 마음속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가? 2000년 이상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온 두 인간의 삶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고쳐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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