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24일 일요일

[양호경 칼럼]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 정당에 투표하는 이유, 혹은 투표하지 않는 이유


  • 서평:『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수도권편』(손낙구, 2010)을 읽고 
  • 투표의 정치적 행위와 계층/계급 대표성에 대해서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수도권편(손낙구,2010)은 투표행위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들이 무엇인가를 분석하기 위한 책이다. 또한 이 책은 왜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한다는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가라는 해묵은 계층/계급 배반투표를 설명하기 위한 책이기도 하다.

1,700페이지 가량의 수도권의 각 동네별 투표율과 정당 지지율, 주택소유비율, 대졸이상 학력자비율, 2년 이내 주거 비율, 종교인 구성 비율 등을 지루하게 나열해 놓은 두꺼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하다. 사람들은 계층/계급 배반투표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정 정당이 과연 특정 계층을 제대로 대변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더라도 국민들은 자신이 가진 재산 정도에 따라 뚜렷하게 계층 투표를 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개인별 직업이냐, 소득보다는 주택으로 대변되는 자산에 따라 투표 성향이 갈라진다는 이야기이다. 저자는 소득차이가 아니라 자산의 차이가 교육이며, 문화생활격차를 가장 잘 드러낸다.”(부동산 계급사회,손낙구,2008)는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해왔고, 그 차이가 투표성향에 영향을 끼친다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지니계수는 0.35로 매년 빈부격차가 더 커지고 있고, 부동산 등에 대한 자산지니계수는 0.89로 극단적으로 소수에게 몰려 있지만 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정치적 세력이 나타나지 않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 대해서 저자는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첫 번째로 가난한 사람들은 이사를 많이 다닌다는 문제점이 있다. “셋방 사는 가구 중 절반 이상은 최소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닌다. 2년에 한 번씩 떠돌며 사는 것 자체가 고역이지만, 투표참여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런 조건에서 현제 살고 있는 동네가 우리 동네가 아니라 곧 떠나야 할 곳일 뿐이다.” 라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사를 많이 다니고, 먹고 사는 문제 자체에 시간과 열정을 많이 쏟기 때문에 정치적인 의사표현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이유가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정당)의 부재이다. “흔한 말로 그놈이 그놈인데 뭣 하러 투표를 하냐는 정서인 것이다. 문제는 계급 배반 투표가 아니라 투표할 이유 자체를 만들어 주지 못하는 정치에 있는 것이다.” 라는 저자의 지적은 2010년 현재 서민을 위한다는 제1야당과,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이 되겠다던 진보정당들에게는 뼈아픈 이야기 아닐 수 없다.

결국 가난한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로 바쁘고, 별로 와 닿는 대안세력도 없기 때문에 투표를 하지 않게 된다. 서울지역의 투표율이 높은 10개 지역은 동네 가구 중 84%가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 반면 투표율이 낮은 10개 지역에서 집을 소유한 사람은 26%에 불과하고 무주택자가 74%에 달한다. 거기다가 무려 17%는 반지하나 옥탑방등에 살다.

필자도 과거 눅눅하고 곰팡이가 피던 반지하 방에 살았었는데, 대부분의 그런 가정은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시고, 8시나 9시 다 되어서 퇴근을 하게 된다. 퇴근하고 아이들 밥 챙겨주고 나면 또 다음날의 생계활동을 위해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 이러한 가정이라면 선거일 휴일이 되어도 하루 일당을 벌기 위해서 작업장으로 나가야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육체적 피곤함에 휴식을 취하는 게 가장 적절한 선택이 될 것이다. 2년 뒤면 또 다른 지역으로 방을 옮겨야 하는데 동네에 큰 도로가 생긴다거나, 스포츠 센터를 유치하겠다던 모모 국회의원의 공약이 귀에 들어오겠는가.

반대로 자기 집을 소유하고 소득이 높은 가정은 동네 네트워킹이 강한 편이다. 소득이 높은 가정일수록 전업주부의 비율이 높고 아이들 교육이나 갖가지 여가 활동들을 중심으로 인적교류가 잘되어 있다. 자연스레 동네 여론이 생기게 되고, 선거 시기가 되면 어떤 사람들이 자신에게, 혹은 자신의 집값을 높여줄지를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똑똑한 투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투표율이 높은 지역의 전문대졸 이상 학력 비율은 86%이고, 투표율이 낮은 지역의 전문대졸 이상 학력 비율은 50%에 불과하다. 학력차이-소득(자산)차이-정치적 선택 유무라는 느슨한 연계가 비율 차이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한나라당이며, 현재의 민주당, 혹은 진보정당들에 대한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이념에 대한 판단은 이견이 있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한나라당이 조금 더 시장경제우선이며, 고소득자들에게 면세해택을 주는 등 경제적 상위계층 중심의 정책을 편다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생각한다. 결국 똑똑하고 잘사는 지역의 사람들의 투표율이 놓고, 한나라당에 투표를 많이 한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물론 정치적 선택은 복합적이다. 사람들은 어떤 한 가지 고려요소만으로 후보자를 전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수도권편에서 각 계층/계급이 스스로의 이해기반에 맞게 투표를 했었다는 것에 대한 반복적인 입증 노력은 현재에 대한 해석보다 미래에 대한 지향으로 더 의미가 있다.

정치는 한정된 재화를 분배하는 행위이고, 국가는 세금을 거두어서 그 용처의 우선순위를 정한다. 정부는 예산편성권으로 입법부는 예산 승인권으로 나타나고, 그 권위는 결국 유권자의 투표로 인해 인정되는 것이다. 세금을 거둬들이고, 그 예산을 어떻게 쓰느냐에 대한 문제는 관념화된 이념의 문제나 정치적 이슈보다 훨씬 한 개개인 국민들에게 고귀한 문제이다.

내가 낸 세금으로 저소득층 주택보조비를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내가 부자인데 누진세 비율이 얼마냐 되느냐의 문제가 유권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앞으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수도권편도 결국 자산과 학력이라는 문제로 투표율을 분석하면서 선거 결과와 완전 일치하는 선거용 백과사전을 만든 것이 아니다. 저자도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이해기반을 대변해줄 수 있는 정치세력을 지지하고, 또한 정치세력들도 자신의 이해기반을 대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한다.

최장집 교수는 현실정치에서 경쟁하는 세력들이 추상적이고 관념화된 이슈를 가지고 싸울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중심 이슈, 즉 사회경제적 문제를 가지고 경쟁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완벽하게 모든 국민으로부터 지지받는 정당은 없다. 그리고 모든 정치적 스펙트럼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정치인도 없다. 유권자 또한 결국 찍을 수 있는 표는 한 표밖에 없다. 정치인이든 유권자든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 일정부분의 정치적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백악관 보좌관들의 이야기인 미국 드라마 <The West Wing>에 보면 " 메이저리그 야구는 팀당 1년에 162게임을 하는데 최고의 팀도 54게임 이상은 지고, 최악의 팀도 54게임 이상은 이긴다. 우리가 좋은 팀이 되기 위해서는 나머지 54게임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All or Nothing의 목숨을 건 관념적 정치싸움이 아니라 의미 있는 합의를 위한 정치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경제적 정책과 철학으로 논의가 되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당도 스스로의 지지기반을 대변하기 위한 정책을 실천적으로 구성해야 하고, 투표도 그렇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의 말처럼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수도권편은 그러한 사회경제적 자료를 어떻게 가공해서 정치적인 의지로 드러내야 하는지를 경험적으로 잘 보여주는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2012년 6월 22일 금요일

‎[동암 산책] 통합진보당 내분사태를 정치학적으로 바라보면

19대 총선 이후 다수당이 된 새누리당이 지향하는 대한민국의 종착지는 어디인지 알 도리가 없다. 온통 종북세력에 대한 정치논쟁에 빠져 정책을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의 내분으로 야기된 ‘종북정국’을 정치의 프리즘으로 파고들면 다음과 같은 3가지 문제가 얽혀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정당 내 파벌갈등과 사회적 이념갈등이 혼재되었다. 통합진보당의 당권파는 일반적인 진보주의자가 아닌 별개의 ‘종북좌파’로 공격받았는데, 그들은 때론 당내 경선룰을 지키지 않았다고 때론 주사파 이념 때문에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이 점에서 보수 언론의 진보세력 갈라치기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통합진보당을 민주통합당과 다른 좌파정당으로 구분하고 좌파정당 내에 또다시 종북좌파 파벌의 존재를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진보진영의 대응은 수준 이하였다.

둘째, 정당의 운영방식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방식이 노정되었다. 통합진보당 내분을 정당 내부 문제로 바라보는 관점과 선거제도의 일부로 바라보는 관점이 나뉘어졌다. 사실상 공직후보자 공천은 크게 보아 정당 내부의 문제로서 정당이 어떤 후보를 선출할지는 정당이 알아서 할 문제다. 사실 당대표가 당헌ㆍ당규에 따라 전횡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당내경선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현행법에 따라 선거제도의 일부로 접근해야만 한다. 지난 2005년부터 정당의 당내경선은 선거법에 포함되어 법적 규제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인 스스로가 자초한 일로써, 스스로 강제규범에 묶이기를 자청했을 정도로 정당 내부의 취약한 기율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이석기ㆍ김재연은 현행법상 선거사범으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법원의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범죄자로 규정한 것은 지나친 일이다.

셋째, 정당 내 파벌의 역할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드러났다. 통합진보당의 소위 ‘당권파’와 ‘혁신파’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입장과 선호도에 따라 무수한 의견이 피력되었다. 이들 의견을 진지하게 종합하여 정당 내 파벌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당내 민주화에 기여하고 대국민 홍보의 계기를 만드는 순기능은 계속 발전시켜야 할 것이고, 정당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역기능을 줄여나갈 때 정치인들에 대한 신뢰가 전반적으로 회복될 수 있겠다.

이번 통합민주당 사태로 우리 정치의 얄팍한 술수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짓게 되었지만, 동시에 ‘종북’이라는 말이 주는 해악과 파벌활동에 대한 다각적 측면을 바라보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2012년 6월 21일 목요일

‎[BK칼럼] 아킬레스와 알렉산더

마키아벨리는 『군주론(On Prince)』에서 재미있는 비유를 들고 있다. 마치 사수(射手)가 멀리 있는 과녁을 맞추기 위해 과녁보다 약간 높은 곳을 조준하고 시위를 당기는 것처럼, 위인들도 대개 자신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을 삶의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그 예로 들고 있는 것이 알렉산더는 아킬레스를 모범으로 삼았고 카이사르는 알렉산더를 모범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플루타르크 영웅전(Plutarch's Lives)』을 보면 알렉산더는 먼 원정길에서도 항상 호머의 『일리아드(Iliad)』를 끼고 탐독하며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스를 흠모했다. 또한 대기만성형인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 중에 알렉산더의 전기를 읽으며 젊은 나이에 대(大)제국을 건설한 그와 자신을 비교하여 눈물을 흘렸다.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은 한니발이나 카이사르의 전쟁을 읽고 또 읽을 것을 강조했고, 히틀러는 독일민족의 영웅인 프리드리히 대왕이나 비스마르크를 흠모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인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이는 위대한 행위를 통해 역사 속에서 불멸의 존재로 그 이름을 남긴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불멸의 명예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트로이 전쟁에 참가한 아킬레스가 그렇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수천 년이 흐른 지금까지 우리에게 기억되는 알렉산더가 그렇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에서 종교인과 철학자들이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영원성'을 추구한 반면 정치인이자 군인이었던 고대의 시민들은 활동적 삶(vita activa)을 통해 시간 속에서 영속하고 세계와 함께 죽지 않는 '불멸성'을 추구했다고 말한다. 

진리를 추구했으나 단 한편의 글도 남기지 않은 소크라테스와 달리 정치인이자 군인이었던 페리클레스는 비록 펠로폰네소스전쟁 중 쓰러졌지만 그의 30년 치세(治世)가 이룩한 아테네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기억되며 깊은 영감을 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어느 샌가 이러한 '불멸성' 즉 명예에 대한 추구는 헛되고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되고 오늘날의 현대인에게는 '돈'과 '건강'에 대한 욕망만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작년에 개봉했던 두 편의 영화 『트로이(Troy)』와 『알렉산더(Alexander)』는 바로 이러한 고대인들의 잊혀진 고민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영화였다. 

시대적 배경과 박진감 넘치는 고대의 전투장면을 재현한 것 뿐 아니라 두 영화는 모두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불멸의 명예'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알렉산더』에는 『트로이』처럼 21세기 헐리웃 영화에 친숙한 관객들을 배려하는 친절함이 없었다. 그래서 항간의 지루하다는 혹평이 이어지는 것이다. 사실 『트로이』는 너무나 친절한 영화였다. 

아킬레스와 동성애 관계라는 혐의를 받기에 충분한 파트로클로스도 사촌동생 쯤으로 거부감 없게 적당히 얼버무리고, 다소 생뚱 맞을 수 있는 아킬레스의 최후를 사랑하는 브리세이스를 구하기 위해 활약하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는 것으로 각색한 것이라거나, (원래 『일리아드』에서는 트로이목마 작전 이전에 암살됨) 신들의 개입이라는 신화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오직 인간들의 이야기로 풀어낸 점 등이 오늘날의 관객들을 위한 최대한의 배려였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알랙산더』에는 그런 배려가 하나도 없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알랙산더 편이 거의 그대로 영화화되어 있는 듯 싶다. 그래서 오늘날의 관객들이 보기에 알랙산더는 정말 생뚱 맞은 인간이 되었다. 올리버 스톤 감독이 프톨레마이오스를 통해 알랙산더의 입장을 옹호하려고 지루한 나레이션을 잔뜩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관객들이 그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아킬레스와 파트로클로스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헤파이스쳔과의 동성애 비슷한 관계도 거부감을 일으키고 이해할 수 없는 원주민 부족과의 결혼을 강행하거나 다리우스 왕을 쓰러뜨린 이후에도 많은 병사들의 반대와 파업을 무릅쓰고 인도까지 무리한 원정을 감행하는 것도 그렇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는 '도대체 알랙산더가 그런 무모한 원정을 하는 이유가 뭔가'를 가르쳐 달라고 감독을 힐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아킬레스와 알렉산더는 고대인들이 추구했던 불멸의 명예를 온몸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같은 인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관객들이 우회적으로 표현된 아킬레스에 열광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진 알랙산더에게 공감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나 아렌트가 지적하고 있는 고대인들의 '불멸성'과 명예에 대한 갈망이 근대 이후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낯선 욕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최근에 일고 있는 '웰빙(Well-being)' 열풍을 생각해보자. 본래 서구 선진국에서 자본주의 질서가 강요하는 무한경쟁의 도가니에서 일탈하여 전원의 자연친화적이고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웰빙의 본래 취지는 사라진 채 그저 일찍 죽지 않기 위한 보신주의로 전락하고 있다. 몸에 좋은 거라면 사족을 못쓰는 그런 천박한 경향이라면 웰빙이라는 멋진 말로 포장하기 이전부터 한국사회에는 쭈욱 존재해왔다. 

아킬레스는 자신이 죽을 것이란 예언을 듣고서도 1000년 후에도 기억되기 위해 트로이 전쟁에 참가했고 알랙산더는 스스로의 생명을 단축하는 무리한 원정을 감행하며 전세계를 일주하고자 했다. 과연 웰빙 보양식과 반신욕으로 100살까지 건강하게 사는 삶과 33세에 요절했지만 2000년이 넘게 기억되는 불멸의 삶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더구나 오늘날의 우리는 그러한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론 불멸의 명예를 향한 알렉산더의 열정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나 역시 그의 원정에 동행했더라면 대다수의 부하들처럼 왕에게 회군을 독촉하는 입장에 서지 않았을까 싶다. 무수한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불멸의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의 군인과 정치인에게 필요한 덕목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명예로운 삶이란 무엇인가? 과연 우리는 활동적 삶과 창조적 행위, 그를 통한 불멸의 명예를 지향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약간 높이 쏜 화살의 과녁 같은 마음속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가? 2000년 이상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온 두 인간의 삶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고쳐 묻게 된다.

2012년 6월 16일 토요일

[BK칼럼] "진보 집권하면 뭐 할래?"…3인 3색의 해법


  • 선대인, 장하준, 김대호 3권의 책 펴내 
  • 재벌개혁, 주주자본주의, 비정규직 문제 '격론'

선거를 앞둔 정치권 못지 않게 출판 시장의 경쟁도 뜨겁다. 특히 진보 진영 논객들이 내세우는 진보 집권 이후의 청사진은 그야말로 각양각색. 올해 말 대선까지 이어질 진보 진영의 뜨거운 정책 논쟁을 3권의 책을 통해 들여다보자.

먼저 선대인의 "문제는 경제다"는 재벌개혁과 탈토건을 전면에 내세운다. 최근 <나는꼽사리다>와 <세금혁명당> 등으로 가장 주가를 높이고 있는 선대인은 범야권이라고 할 수 있는 진보진영의 대표적인 '진영논리'를 대변한다. 재벌 계열사 분리와 출자총액제한제 부활 등의 재벌개혁 조치로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민주화'를 이루자는 것은 한국 진보세력이 꾸준히 주장해온 것. 거기에 선대인의 출세작(?)인 "부동산대폭락 시대가 온다" 이후 꾸준히 주장해 온 부동산거품 붕괴론과 '토건세력 망국론' 등을 덧붙였다. 
그에 따르면 집권 이후 야권은 금리를 올려서라도 부동산 거품을 꺼뜨리고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토건성 예산을 줄여서 복지 재정믈 마련해야 한다. 또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소득에 매한 세금도 대폭 늘려야 한다는 것.

또 다른 대표적 진보논객인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이런 진보진영의 '재벌개혁론'에 반기를 든다. 그는 최근 펴낸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의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2005년 나왔던 "쾌도난마 한국경제"의 업그레이드판 주장을 선보인다. 당시에도 큰 논란이 됐던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이른바 '착한 박정희' 방식의 정부 개입과 산업정책을 옹호하고 나선 것. 그는 기존의 진보세력들이 '재벌개혁'이란 미명하에 미국식 주주자본주의 도입에 앞장서고 있으며 이를 통해 양극화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기업의 중소기업 단가 후려치기 등의 만행도 따지고 보면 주주자본주의와 타협한 재벌들이 단기적인 수익률을 높여 주주들의 이익에 부합하기 위해 더욱 심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집권세력이 해외투기자본에 대항해 재벌들의 경영권을 보장해주되 복지 재원 등의 양보를 받아내는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장하준, 정승일 교수와 진보진영 내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여온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은 최근 "결혼불능세대"를 펴냈다. 정승일 교수 등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를 통해 '복지국가론'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김 소장은 '공정·공평 사회론'의 선구자인 셈이다. 김 소장은 결혼불능세대를 대변하는 윤범기 MBN 기자와의 대담에서 장하준 교수의 '사회적 대타협론'이 "한국 사회의 속살을 보지 못했다"며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2005년 당시 "쾌도난마"를 읽고 감화된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뉴딜'을 제창하며 사회적 대타협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세계화와 중국 효과로 인해 "인간의 수명을 제외한 모든 것의 수명이 줄어들었다"며 비정규직의 증가를 불가피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비정규직 철폐'가 아닌 '비정규직이어도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대기업과 공공부문 등의 지나치게 높아진 임금과 복지수준(철밥통)에 상한선(캡)을 설정해 더 높아지지 않도록 하고, 비정규직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한편, 국가가 고용 보험을 두텁게 제공해 비정규직으로도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는 '플라스틱 밥통'을 늘려가야 한다는 것. 또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을 폐지해 누구나 대기업의 불공정행위를 고발할 수 있도록 하고, 은행설립 기준을 완화해서 중소기업의 돈 줄을 풀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청년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 한미FTA도 긍정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런 진보논객들의 주장은 현실 정치세력들에 의해 얼마나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선대인의 '경제민주화'론은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등 야권의 공식 정책으로 채택되는 분위기다. 주요 야권 정치인들이 선대인이 출연하는 나는꼽사리다 등에 출연해 공감을 표시하고, 선대인 스스로도 트위터 등을 통해 이런 정치인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다. 다만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듯이 선거가 끝난 후 얼마나 정치인들이 이를 실현할지는 미지수다.

장하준의 '착한 박정희론'은 오히려 진보세력보다는 역시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과 친화성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재벌에 대한 최근의 비등한 여론을 감안할 때 야권이 이런 '재벌활용론'을 채택하기는 어려울 것. 실제로 저자들은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맞춤형 복지론'의 가치를 인정하기도 했다.

김대호의 '공정·공평사회론'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개혁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 할 만하다. 지금은 야권연대의 영향으로 민주통합당 내에서 목소리를 낮추고 있지만 김병준 전 참여정부 정책실장과 김두관 경남도지사, 송영길 인천시장 등이 이런 김 소장의 노선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과연 야권을 지지하는 '진보' 유권자들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런 치열한 정책논쟁으로 밤을 세워도 모자랄 판에 구태적인 '종북 논란'으로 선거판이 혼탁해지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2012년 6월 15일 금요일

[MH칼럼] 금메달리스트에게 병역면제 혜택을 주는 것은 정당한가?


마이클 샌델의 신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는 학생들에게 책을 읽은 권수에 비례하여 일정금액의 돈을 인센티브로 제공하는 어느 학교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물론 학생들에게 독서를 장려하고자 하는 건전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프로그램에 대해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샌델은 그 불편함의 이유가 바로 가치의 타락에 있다고 설명한다. 학생들에게 독서를 장려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중요한 목표이지만, 그것의 대가로 돈을 지불하는 것은 독서의 참된 가치를 훼손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활의 위로, 스토리를 읽는 즐거움, 내면적 성숙 등 다양한 이유로 독서를 한다. 하지만 돈을 벌기위한 수단으로 독서를 하지는 않는다.

이 글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키워드는 가치'와 '사회적 의미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다양한 행위들에는 그것이 가진 본질적인 가치가 내포되어 있으며, 그러한 가치가 사회적 가치로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분배되는 과정을 우리는 정치행위라고 부른다. 가치가 분배되는 정치과정에서 우리는 그 가치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며, 공동체의 건강함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우리 공동체에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온 선수에게 <병역면제 혜택>을 포상으로 부여하는 제도가 있다. 이것은 정당한가? <병역면제 혜택>은 어떤 의미에서건 시민들의 공정한 병역의무 이행이라는 가치를 훼손하고 있지는 않은가?

민주사회에서 시민들에게 부과되는 의무는 그것이 공동체의 존립과 유지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일이며, 순수하게 자발성에만 기초해서는 충족되기 힘든 특정한 일들(ex. 세금, 병역 등)과 관련이 되어있다. 따라서 시민들 각자는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공공의 이익을 향상시킬 수 있으며, 그것은 의무를 이행한 자신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민적 의무의 이행은 명예롭고 긍정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하며, 반대로 그러한 의무의 이행으로부터의 면제에 대해서 사회적 명예나 보상의 의미가 부여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사회에서는 병역의무로부터 면제시켜주는 것을 혜택으로 제공하며 그것을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다. 병역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단지 힘들고 귀찮은 것으로 여겨지는 한, 이것으로부터 열외 시켜주는 것은 보상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국민적 영웅으로 여겨지는 운동선수들에게 병역면제 혜택을 주는 것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지지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팬으로서 국민들은 스포츠 영웅들이 군 복무를 통해 그들의 재능을 낭비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국제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계속해서 거두어서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해주기를 바란다. 또한 병역면제 혜택은 운동선수들에게도 필사적으로 금메달을 따게끔 하는 동기부여의 기능을 한다. 운동선수들에게 있어서 가장 열심히 훈련하고 활동해야 할 시기에 군 복무를 한다는 것은 그들의 경력에 있어서 큰 손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역면제를 통한 포상의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보상을 검토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우선, 병역면제를 포상의 수단으로 보게 되면 병역의무가 가지는 공적인 가치를 훼손하게 될 것이고, 병역을 이행한 시민들에 대한 존중을 손상시키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기여를 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어야지, 시민적 의무의 면제를 주어서는 안 된다. 시민적 의무의 면제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으면서도 개인에게 특혜를 줄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다. 의무로부터의 면제는 개인의 불가피한 사정에 대한 고려(예컨대 신체적 장애나 종교적 신념 등의 사유 등)에 의해서만, 또는 공동체의 필요와 여건에 의해서만 조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면제에 대해서 굳이 불명예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공적 의무를 이행한 것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존중과 보상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보상에 필요한 비용은 사회 구성원 전체가 균등한 방식으로 부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우리 공동체의 병역의무 이행자들에 대한 처우나 보상수준, 징집의 일방적 동원의 성격을 고려할 때,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의 병역의무 이행은 민주사회의 시민들이 이행하는 시민적 의무라기보다는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이루어지는 국가에 의한 동원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금메달리스트에 대한 병역면제 혜택을 포상하는 것은 마치 현역 군인이 포상휴가를 받는 것과 유사한 형태로 국가로부터 부여된다. 민주사회의 시민이라면 결코 동료시민에 대하여 이러한 형태의 공적 의무의 면제를 선물하지 않을 것이다. 병역면제가 혜택으로 주어지는 것은 그것이 가지는 시민적 의무로서의 가치를 훼손시킨다. 우리는 공동체에 기여한 성원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보답을 할 수 있다.

병역의무의 이행이 특정한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에게 과도한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들이 보다 적합한 방식으로 의무를 이행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과 애정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함께 공유한다는 것에서 나온다. 시민은 공적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공동선에 기여를 한다. 공적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때로는 개인에게 수고스럽고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 의무를 가급적이면 모든 시민들에게 공정하게 분배하기 위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공적 의무를 수행한 또는 수행하고 있는 시민들에 대하여 합당한 보상을 제공하고, 존경의 마음을 표시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병역의무를 부담하는 방식에 있어서 시민들을 보다 다양하게 보장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서, 독일의 경우에는 병역이행에 있어서 분할복무 등을 인정하고 있다. 시민들이 병역을 이행하되, 자신의 인생계획에 맞추어 원하는 시기를 조정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운동선수들과 같은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이 이 제도의 직접적인 수혜자가 될 수 있는데, 분할복무는 2년이라는 장기간의 공백이 초래할 희생을 상당부분 줄여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역의무가 시민들에 민주 사회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업무로 인식 된다면 시민들은 보다 책임감을 가지고 의무를 이행할 것다. 그리고 그것은 대한민국의 안보를 더욱 튼튼히 하는데도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2012년 6월 14일 목요일

[유혜영 칼럼] 미국 학부교육 관찰기

학부를 마치고 처음 시카고 대학에 유학 왔을 때 가장 놀랬던 것은 캠퍼스에 하이힐 신은 학생이 없다는 것도, 백팩을 매지 않은 학생이 거의 없다는 사실도 아니었다. 내가 가장 놀랬던 것은 바로 수강신청을 한 수업의 책을 사러 들어간 CO-OP이라는 대학 서점에서 마주한 책의 종류들이었다. 내 기억에 명색이 대한민국 지성의 전당이라고 하는 서울대 교내 서점은 겹겹이 쌓인 고시 서적과 영어 교재들, 혹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나 가벼운 소설들이 주인공으로 자리한 공간이었다. 수업 시간에 언급되었던 고전들이나 좀 ‘심각한’ 책들을 출판하는 한길사나 후마니타스의 책들은 구석에서 가끔 전해져오는 손길을 기다릴 뿐. 대학의 교재 역시 여러 논문들이나 책의 몇 챕터를 따다가 제본한게 주를 이루었고 말 그대로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을 한 권 제대로 다 읽는 경우는 정치철학 수업이 아니면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풍경에 익숙했던 나에게 시카고 대학 서점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미로처럼 생긴 서점의 처음부터 끝까지 고전들이 책장 가득가득 쌓여 있었고 각 수업의 교재들 역시 이러한 고전들이 적어도 10권 이상씩 할당되어 있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녹두에서 했던 고전 읽기 모임에서 읽으려고 찾아보려고 해도 서울에서 찾기 힘들었던 칼 폴라니의 ‘거대한 변환’과 (결국 범기오빠가 공사 도서관에서 찾았던 걸로 기억한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는 서점의 안방마님처럼 당당히 그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빠지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이를 교재로 쓰는 수업이 단순히 철학 수업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학, 종교학, 미학, 역사학, 수학 등 인문 사회 자연 과학의 다양한 학문 분과들에 이 교재들이 학생들에게 읽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도서관에서 목격하는 풍경들도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늘 고시생들이나 그 어떤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즐비하고 중간,기말고사라도 겹칠때면 자리잡기가 힘들었던 그 빽빽한 도서관과 달리 넓고 쾌적한 도서관에서 학부 아이들은 몽테스키외를 읽거나 홉스를 읽으며 에세이를 쓰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책을 읽고 아이들은 많은 글을 써서 냈다. 내가 조교를 했던 수업에서는 아이들이 essay를 과제로 내면 교수나 박사과정 조교가 당연히 아주 꼼꼼하게 코멘트를 붙여서 다시 학생들에게 돌려줘야 했고 자신의 받은 코멘트에 궁금한 점이 있거나 수업내용에 질문이 있는 학생들은 언제든 교수님과 조교를 찾아서 질문을 했다. 내 학부시절을 되 돌아보면 꽤 많은 ‘레포트’를 제출했던 것 같은데 내가 받은 건 성적이었지 내 글에 대한 꼼꼼한 코멘트는 없었던 것 같다. 거기에 비하면 미국의 학부 교육은 철저한 피드백 시스템으로 움직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버드로 박사 과정을 오면서 코스워크가 끝나고 다시 학부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버드는 시카고 대학보다 학부교육이 좀 더 체계적으로 짜여 있었다. 미국의 대부분의 대학은 정규 수업외에 section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 정규 수업의 규모가 큰 경우 조교가 따로 discussion section을 일주일에 한번씩 열어서 수업 중에 하지 못한 질문을 학생들이 하고 부족했던 토론을 하는 것이다. 조교 한명당 18명의 학생이 주어지고 만약 수업을 듣는 학생이 19명이면 반드시 조교가 2명이 할당되어야 한다. 맨큐 교수가 가르치는 경제 원론 수업의 경우 대형 강의를 맨큐 교수가 하고 일주일에 무려 3번씩 조교들이 section을 한다. 대형 강의는 큰 그림만 짚어주기 때문에 이때 생긴 의문이나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section을 통해서 알아가고 이해해 간다.  

다시 학부시절로 돌아가 기억을 더듬어 보면 대부분의 사회대 전공 수업들은 50명이 훌쩍 넘는 수업들이었지만 조교는 1명 정도 있었던 것 같다. 100명이 넘는 수업이 되야 조교아 2~3명 정도 있었고. 시스템이 이렇다보니 조교가 학생들을 데리고 개별 section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학생들은 대형 강의만 반복해서 들으면서 한 학기에 단 한번도 수업시간에 말을 하지 않은 채 학기를 마무리 하는 일이 많아졌던 것 같다.  

매주 섹션이 있고 말 할 기회가 더 많은 미국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도 매우 적극적이다. 어릴때부터 받아온 훈련이 우리와 달라서일지 모르겠지만 ‘남 눈치’ 보는 일이 없다. 모두가 이해하고 나만 이해 못했더라도 그걸 부끄러워 하거나 ‘있다 집에가서 이해해야지’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바로 바로 교수에게 질문을 한다. 자기가 모르던 부분을 질문함으로써 이해하고 그로부터 흥미가 생겼을 때 학부생들이 매우 자주 쓰는 말이 바로 “it’s fascinating!’ (환상적이야!) 이다. 이런 환경과 마음가짐이라면 공부가 재미있을 수 밖에 없다.  

비단 수업 시간 뿐만 아니라 연사가 초청되는 세미나나 학술 행사에도 학부생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발언한다. 물론 교수가 앞쪽에 앉고 학생들이 주욱 강의실 뒷줄부터 채우는 일도 없다.생각해보면 학부생들은 수강신청 사인받거나 장학금 신청할 때 오르락 거렸던 교수님들의 오피스가 있었던 사회대 4,5,6 층 게시물판에는 다양한 세미나가 있었던 것 같은데 학부생들에게 잘 소개가 되지도 않았고 학부생들이 참여하면 오히려 어색하고 ‘엄한’ 분위기의 세미나가 많았던 것 같다.    

하버드는 이 외에도 학부교육에 엄청난 자원과 애정을 쏟아 붇는다. 수업 각각에 피드백 시스템이 존해하고 새로운 교수법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를 지켜보면서 한편으로는 허전한 마음을 비켜갈 수가 없었다. 관악의 학부교육이 자꾸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이 얽혀있기 때문에 대학이 바뀐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학이 할 수 있는 일들은 해야한다.  

한국의 대학에 잃은 활기와 지성을 되찾기 위해서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대학생들의 ‘몸’을 자유롭게 하는 다양한 상업시설을 들여오고 건물을 개보수 하는 것이 아니다. 대학생들의 ‘머리’를 자유롭게 하는 일들이 필요하다. 수업의 실라부스를 고민하고 더 많은 책과 고전을 읽히고 학생들이 글을 더 많이 쓰도록 하게 해야한다. 학생들이 쓴 글에 대해서 반드시 피드백을 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또 학생들이 말을 하게 하라. 눈치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과 의문을 교실안에서라도 훨훨 내 뱉게 해야 한다. Fact를 전달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하는 역할은 대학이 아니라 인터넷이 하고 있다. 우리 시대 대학이 대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읽고 쓰고 말하는’ 훈련이다.

2012년 6월 12일 화요일

[모임 공지 : 1"이달의 베스트 정치평론" 심사회]
 
- 일시 : 630() 15~17(2시간)
- 장소 : 신촌 세미나카페 미플(신촌역 4번 출구, 02-313-4300)
 
* 그동안 올라온 정치평론은 리뷰하는 자리를 가져볼까 합니다.
커피 한잔 마시며 즐겁게 대화나누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참석가능하신 분들은 댓글로 참석여부를 알려주세요 :)

2012년 6월 11일 월요일

[신영범 칼럼] 침묵의 대학과 민주정치


   지난 2002년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이는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발전했는가?’하는 문제의식에 관한 책으로 이 질문에 관한 최장집 교수의 답변은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정치현실이 발전하지 못하였다면 그 이유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 이유를 내가 살고 있는 대학에서 찾아보려 한다.
 
   87년 이전과 현재를 비교해 보았을 때 가장 많은 변화가 일어난 곳이 바로 대학이다. 과거 가장 뜨거웠던 대학이 현재는 굉장히 수동적인 장소로 변해버렸으며, 학생들은 열심히 수업만을 외우고 있으며, 많은 이들은 고시준비나 취업준비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과거 수많은 학생들로 가득차곤했던 아크로는 이제는 몇 몇 학생들이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는 애물단지 같은 곳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과연 이러한 대학의 변신이 한국의 민주정치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 것인가?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일단 현실에 대한 분석에 앞서서 대학이라는 공간에 대하여 살펴보자. 과연 내가 생각하는 대학이 어떠한 모습을 띄고 있기에 현재의 민주정치에 어울린다는 것인가?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과거 중세와 근대 유럽의 대학이 형성될 시기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중세와 근대 대학의 형성기. 이 두 시기에는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대학 형성의 중심에 논객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바로 아베라드와 피히테이다. 이들은 토론을 즐겼으며 배움을 추구하였고, 이를 위하여 먼 길을 떠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특성을 가졌다. 따라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시대의 현자들에게 배움을 청하였고, 현자들과 토론을 하였으며, 때로는 그들에 대한 도전도 불사하였다. 물론 이들 사이에는 차이점도 있다. 아베라드가 주로 당시의 일반적 학풍에 대한 대듦으로 당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면 피히테는 여러 학자들 간의 토론을 통해 학문의 연계를 추진하였다는 점이 바로 이 둘 간의 차이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의해서 그들 당시의 유럽은 지적인 공론장의 분위기가 형성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서 아베라드 시기에는 중세의 대학이, 피히테 시기에는 근대의 대학이 형성될 수가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대학은 굉장히 논쟁적인 성격을 지닌 곳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에 대하여 많은 참여를 담보해 주는 곳이었다. , 대학이 사회적 토론의 장을 마련해 준 곳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중세 대학에서는 축제시기에 절정을 이룬다. 중세 대학의 축제는 토론으로 시작하였으며 열띤 토론의 끝과 함께 술과 고기로 파티를 열었던 행사로, 대학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거리의 사람들까지 그 토론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곳이다. , 모든 이들이 참여하여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자리이다. 이러한 참여와 토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바로 사회내부에 정상적인 의사소통 구조가 형성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이러한 토론과 참여가 정치적으로 확대되었을 시에는 흔히 말하는 민주정치의 이상 “self-rule”이 가능해진다는 점에 참여와 토론이 가지는 정치적 함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중세의 대학과 같은 분위기의 형성이 민주정치를 위하여 필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고, 그 중심에는 아베라드와 피히테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대학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선 대학의 전반적인 모습을 살펴보기에 앞서 대학생의 삶부터 살펴보자. 다음은 대학생인 나의 하루 일과이다. 아침 기상시간은 보통 아침 6시이다. 7시에는 영어회화 학원이 있으며, 8시에 학원을 마치면 그 근처에서 아침을 해결한 후(물론 혼자서) 곧장 학교 도서관으로 향한다. 수업은 모두 오후에 몰려 있으며, 오후 6시에 모든 수업을 마치고 나서는 요일별로 농구, 토론, 과외, 학생회 운영위원회 활동 등을 하고 이 일이 끝나고서는 친구들이나 선후배와 함께 가볍게 한잔하러 가거나 혹은 기숙사에 들어와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오전 6시 즈음에 첫 강의를 듣고 모두가 함께하는 기숙사 생활을 통해 공동식사를 하며 저녁시간에는 그들만의 자유시간을 가졌던 중세의 대학생의 생활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현대의 대학은 묘하게도 너무나 정적인 장소로 변해가고 있다. 과거 어느 곳보다 더 시끌벅적하며 생기가 넘치는 곳으로 묘사되었던 대학이라는 공간이 현재는 그 어느 곳보다도 조용한 학위의 전당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리고 대학의 학생들은 점점 누구보다도 순종적이지만 어느 누구에게서도 속박 받지 않는 자유인이 되려하고 있다. 이 속에서 나와 다른 삶과 다른 학문을 하는 이들은 남남으로 여기는 풍토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나의 말이 믿어지지가 않는다면 평소 대학의 교정을 걸어보고 대학의 학문을 느껴보아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학사회 내부의 공동체를 살펴보라.

   대학의 성당학교화는 대학 내부에만 파장을 미치는 일이 아니다. 이는 사회 전반으로 영향력을 확장해간다. 특히 이러한 점은 민주화 이후의 한국정치에 큰 파장을 불러올 사건이다. 민주화 이전에는 무엇보다도 민주화라는 뚜렷한 목표가 존재하였다. 그 결과 민주화를 둘러싸고 사회의 각계각층에서의 연대가 이루어 질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의 역동성을 담보할 수 있었고, 민주화를 통해서 한국정치의 질적 발전을 꿈꿀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뚜렷한 목표가 사라져 버리면서 각계의 연대는 깨져버렸다. 이 상황에서는 무엇보다도 이 세력들 간의 토론을 통한 정치적 의사의 형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제는 더 이상 한국정치에서 키 역할을 해 줄 뚜렷한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키 역할을 토론을 통하여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민주정치는 이리저리 표류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국사회에서 토론장은 매우 빈약하다. 그 결과 최장집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한국의 민주정치는 민주화 이후 질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고, 좌충우돌의 코미디가 되어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성당학교화 되어버린 대학과 따로 떨어뜨려 놓을 수 없다. 한국사회 내부의 의사소통 구조의 중심에 서있는 대학사회의 학생과 교수들의 대화와 토론이 단절되어 버리고 왜곡되어 버린다면 이는 비정상적인 의사소통 구조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의 변화가 한국의 민주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점은 바로 이 점과 관련되어 있다.

   과거 1950년대 중국은 모택동의 반()우파투쟁을 통한 사회, , 지식인층 내부의 의사소통 구조를 비정상화시켰고, 이는 결국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저지할 수 있는 보호막을 걷어내버리는 꼴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비정상화는 강제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날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사회적 토론의 기초가 되는 대학의 의사소통 구조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필요하다. 현재 침묵의 대학으로는 절대 민주정치의 발전을 보장할 수 없다. 따라서 현대 한국 민주정치의 질적 발전을 위해서는 아베라드 적인 대듦이 아닌 객기를 통한 의사소통이라도 절실히 필요하다

[인태영 칼럼] ‘사상검증’을 주장하는 자,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2012611일자 한겨레 고종석 칼럼 '박근혜가 대통령이 돼선 안 될 이유'를 보았다. 결국, 박정희의 딸이라서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니라고 하지만, 시대착오적 연좌제를 주장하는 것인데, 민주국가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박근혜 전 대표가 박정희의 딸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마찬가지로 야권의 일제 황군 헌병의 딸을 비롯한, ‘친일 고관대작의 후손들도 국회의원을 비롯한 주요공직에 나서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도 반대한다. 잣대는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미 자기진영의 황군헌병의 딸로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상대에게만 엄격하게 들이대면 그 진영에서 조차 민망한 일이다. 박근혜는 박근혜로 평가하면 될 일 아닌가?.
 
최근 박근혜 전 대표는 사상검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난날, 동족을 이데올로기로 기어이 구분하는 것이 사상검증이었고, 외세까지 불러들여 형제들 간에 피터지게 싸우는 것으로 귀결되어 무수한 피붙이들이 희생되었다. 지금 사상검증을 해서 다시 그 비극적 시대로 역행하자는 것인가?
 
또한, 진정한 민주주의는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비록 종북좌파이고 공산당일지라도 공개적,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 아니겠는가? 그들에 대한 선택은 국민이 투표로 한다. 국민의 선택을 몇몇 정치인이 대신 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가? ‘사상검증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폭거 아닌가! 따라서 사상검증을 주장하는 자, 민주주의의 반대자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아버지 박정희를 생각해보자!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동족상잔의 비극, 냉전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일본 육사를 나온 일본군 출신이지만, 남로당의 핵심당원으로 가입한 죄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이다. 그는 동지들을 밀고하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도 형 박상희의 절친, ‘밀사 황태성도 처형해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만 했던 기구한 삶을 살았다. 그는 잔인한 사상검증의 희생자였고, 가해자였다.
 
박근혜 전 대표는 아버지의 기구한 삶을 생각해서라도, ‘사상검증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퇴역하면서, “다시는 나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태어나지 말기를 바란다고 울먹이던 박정희. 아버지가 살아있다면 어떤 심정일까?

2012년 6월 1일 금요일

[서현수 칼럼] "최장집 칼럼"과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 (3) -끝-

선재네 핀란드 이야기: [최장집 칼럼]과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 (3)

4.

민주화 이후 25년, 그러나 ‘세금도, 보험도 없이, 공적 제도의 바깥에서 얼굴없이 살아가는’ 봉제공장의 영세사업주에게, 기업주는 물론이고 정규직 노조마저 적대하고 외면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게으른 복지수급자로 낙인찍히거나 복지서비스의 사각지대에서 끝없는 불행을 인내하며 살아야 하는 빈곤층 서민들에게, 이윤 추구만을 앞세우는 대기업의 권세와 횡포 앞에서 순식간에 생존권을 위협받는 재래시장의 상인들에게, 이른 새벽 찬 공기만 마시다 발길을 돌려야 하는 인력시장의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국가의 체계적인 농업 포기 정책 속에서 갈수록 피폐해지는 농촌 주민과 농민들에게,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전부터 비정규 노동과 반실업 상태로 내몰리며 ‘미래를 꿈꿀 권리’마저 부정당하는 젊은 세대에게,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상에서 상시 인권침해 가능성에 노출돼있는 이주노동자에게, ‘대출 권하는 사회’가 구조적으로 강요한 ‘신용불량’의 딱지와 그 트라우마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300만 명의 인구에게,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무엇이었는가?

나는 최장집 선생의 칼럼들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현재와 미래를 향한 그의 고뇌에 찬 음성을 듣는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왜 우리의 국회의원들과 정치인들은 실제적인 시민들의 삶의 현장을 찾지 않는가? 왜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애로와 호소와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가? 왜 이들의 이해관계와 의견을 정치적 공론장으로 이끌어내고, 관련 당사자들과 그 대표들을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키려 하지 않는가? 왜 현장으로부터 정책을 도출하지 않는가? 정당들은, 특히 진보정당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기본적인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은 채 제도로서 의회와 정당의 총체적 위기와 쇠퇴를 말하며 이들의 기능을 서둘러 폐기처분하려는 조급한 경향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를 최장집 선생은 되묻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대의 민주주의와 제도권 정당의 위기를 말하기 전에 아직 제대로 된 정치적 대표 시스템과 정당 정치조차 갖고 있지 못한 미발전의 민주주의 상태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우리의 신생 민주주의와 의회-정당은 이미 100년, 200년의 역사적 성장과 완숙기를 지난 뒤 새로운 도전에 직면에 후퇴 혹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서구의 그것과 결코 동일한 상태가 아니다.

물론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작동하는 만큼, 수많은 새로운 도전과 위기를 우리도 함께 공유한다. 자본주의 지구화와 탈산업사회적 정보화 시대의 도래, 전지구적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에 대한 녹색 정치의 도전, 인권·평화·젠더·생태 등 새로운 사회적 의제의 확산과 질적 민주주의의 요구, 국제이민의 증가와 다문화사회로의 전환, 더 많은 자치와 참여를 요구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실험 확대 등.이 모든 새로운 도전들은 근대 시민혁명과 주권적 국민국가, 산업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 기초해 성립된 현대 대의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에 중대한 변화의 압력을 불어넣고 있다. 2008년의 ‘촛불집회’와 최근의 ‘나꼼수 현상’처럼 우리 사회에서 더욱 빠르게 실험되고 확산되는 정치문화적 현상도 분명히 감지된다. 더욱이,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 역학의 변동은 우리에게 동아시아의 평화적 질서 구축과 남북한의 미래지향적 통일을 향해 지금까지와 다른 차원의 탁월한 정치적 지혜와 실천이성을 요구하고 있다.

나도 이러한 진단에 동의한다. 안정기를 지난 근대 민주주의가 처한 다층적 위기와 질적인 전환 양상을 살펴보고, 대안적 정치 질서 ― 경희대 김상준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미지의 민주주의’ (김상준, 『미지의 민주주의』, 2011, 아카넷) 의 내용과 형식을 탐색하는 것은 나에게도 핵심 관심사이며, 내가 지금 핀란드까지 와서 다시 공부를 하게 된 중요한 동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는 그들 사회에서 여전히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 집단적 이해관계 및 의견의 형성 및 대표 과정, 그리고 이를 통한 사회적 갈등 및 문제 해결 과정의 핵심적 제도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최근 많은 진보적 학자들과 시민들이 바람직한 모델로 상정하는 북유럽의 사민주의적 복지국가들도 잘 들여다보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는 의회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가 시민들의 삶에 깊이 밀착되어 운영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이들은 입법과 정책 형성 과정에서 관련 사회적 이슈에 대한 객관적이고 철저한 연구 조사, 그리고 모든 이해당사자 그룹들의 의견 수렴과 넓은 참여를 바탕으로 대안적 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합의적 의사결정 모델”을 발전시켜왔다.이들 국가가 높은 정치적 대표성과 민주적 책임성을 구현하고, 나아가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높은 신뢰를 유지해온 비결이다.

우리 시대의 중요한 화두인 참여 민주주의와 숙의(심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도 근대적 형태의 대의 민주주의와 완전히 새로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이를 관계론적, 시민사회론적 지평에서 재해석하고 급진적으로 보완하는 흐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가 한 세기 동안의 고투 끝에 도달한 한 지점으로서 현 단계의 민주주의를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그 내실을 다져가는 가운데, 새로운 도전과 위기를 민감하게 인지하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5.

지난 5월초에 한국에서 핀란드를 찾아온 한림대 김순영 박사와 대화하다 그이가 우리 사회에서 드물게 신용불량자 문제를 천착해 책까지 출간한 전문가이며(김순영, 『대출 권하는 사회』, 2011, 후마니타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부터 오랫동안 최장집 교수를 도와 일해 온 것을 알게 됐다. 실제로 신용불량자를 주제로 한 이번 두 차례의 칼럼에서는 그이의 연구와 조언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지면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 때 김순영 박사와 대화하던 중 최장집 선생이 이 칼럼 쓰는 일이 너무 힘들어 이제 그만두려 한다는 말씀을 전해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 지금 선생이 쓰시는 이 칼럼은 정말 훌륭하고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작업이니 부디 힘을 아끼셔서 지속적으로 글쓰기를 해주시길 바란다는 독자로서의 소감을 전했다.

그러나 고령의 선생이 이 칼럼을 언제까지 쓰실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부디 오랫동안 경향신문에서 그의 칼럼을 볼 수 있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함께 읽고, 우리 정치가 대표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그들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의 글에서 자신의 존재이유와 존재방식을 발견하는 국회의원과 정치인들이 더 많이 생겨나기를, 특히 경직된 이데올로기와 추상적인 거대담론 속에서 구체적 현실을 외면한 채 낡고 좁은 골방에 갇혀있는 진보정치세력이 진정한 혁신의 영감을 얻을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설령 선생이 칼럼을 조만간 그만 쓸 수밖에 없더라도, 그와 같은 정신과 자세로 단련된 많은 시민들이 제대로 된 정치평론과 정책입안, 나아가 책임있는 정치적 대표로서의 활동을 더욱 왕성하게 전개해가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끝)

[서현수 칼럼] "최장집 칼럼"과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 (2)

선재네 핀란드 이야기: [최장집 칼럼]과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 (2):

3.

선생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을 따라 가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한 그의 통찰에 귀 기울여 보자첫 칼럼이었던 장위동 봉제공장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이렇게 진단한다.

봉제 산업이 적지 않은 고용을 흡수하고 도시 서민가구의 소득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에도이 부문의 기업주-노동자들은 정부의 공식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세금도 없고보험도 없이 공적 제도 밖에 존재하는 얼굴 없는 사회경제적인 집단이다......(중략봉제 공장이 밀집한 이 지역에서 정당은 보이지 않는다인터뷰에서도 그들은 선거철을 제외하고는 평상시에 정치인들이 공장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정당과 정치인들도 이들과 의사소통이나 접촉을 시도하지 않는다전국적인 정당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지역구의 정치인 차원에서도 지역구 내에 있는 이들 사회경제적 인구 집단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자기 소리를 내지 못하는 약자들의 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은정치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정당이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정당의 사회적 기반 없이 민주정치는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2011.8.22. 경향신문)

아동복을 제작하는 한 봉제공장 내부 전경(출처: 구글 이미지)

그는 또 새벽 4가을 공기가 차가운 성남의 인력시장을 찾아 전국적으로 57만 명에 달하는 일용직 노동자들 몇 사람을 인터뷰한 뒤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이들에게서 민주주의는 무엇이었나나는 새벽의 인력시장에서 정치와 정당 일반의 부재는 물론이고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진보정당의 부재 역시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정치권과 시민사회 그리고 여러 운동 단체에서 내세웠던 화려하고 추상적인 진보적 구호들과 담론들이 이 현장에서는 아무 흔적도 갖지 못했다이들 노동자들의 존재를 의식한 산업-고용정책외국인 노동자정책주택정책교육정책은 없었다.”(2011.9.26. 경향신문)
새벽 인력시장에서 일감을 기다리는 일용직 노동자들(출처: 구글 이미지)

그의 발길을 계속 따라가 본다이마트가 들어선 뒤 급격한 매출감소로 위기에 빠진 공덕동 재래시장을 방문해 상인들과 대화한 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문제의 핵심은대기업의 과도한 영향력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지이들에 의해 변형된 국가 관료제와 여론매체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대기업의 독점적 영향력으로 인해 파괴된 시장경쟁과 효율성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에 있다한마디로 말해 중소기업과 소매업체들의 경제적 활력을 복원시키는 일은 단순한 온정적 조치가 아니라 한국경제와 한국 민주주의의 중심문제라는 것이다총선대선을 앞두고 여야 정당들 모두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말한다그러나 아무도 중소기업과 소자영업자노동자와 같은 이해당사자들의 참여와 대표의 문제는 말하지 않는다이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자율적 결사체를 강화할 수 있는 기반 없이대기업·정부관료·주류언론의 유착을 제어할 수 있을까사회적 힘의 관계를 더 넓게 다원화하는 작업 없이정당들이나 정치인들이 무정형의 여론매체 위를 둥둥 떠다니며 공허한 개혁 언술을 남발하는 것으로 과연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2012.1.30. 경향신문)
재래시장과 대형마트(출처: 오마이뉴스)
  

황폐해진 농민농업 문제를 고민하며 농민운동 활동가들을 만난 뒤의 칼럼에서는 아래와 같은 질문이 빛난다좋은 질문은 그 속에 이미 좋은 해답의 실마리를 품고 있는 듯하다.

농촌이 이토록 피폐화된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일 수 있을까농업의 붕괴 위에서 산업 발전이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왜 농촌의 피폐와 농업의 붕괴는 방치되어 왔을까농민들의 요구와 불만은 왜 정책으로 수용되지 못했을까농민이 지역적으로 산재해 있어 조직화되기 어렵다는 점도 원인이 될 수 있겠지만무엇보다 한국의 정당체제가 노동자나 농민,중소기업자영업자와 같은 생산자 집단들의 이익을 두고 경쟁하기보다 폐쇄적인 지역갈등 구도에 얽매어 있었다는 데 기인하는 바 크다지난 10년 동안만 해도 농업인구가 22%나 급감해 이제는 겨우 300만 명밖에 안 되는 열세 집단이 되었다는 점도 정당들이 그들에게 다가갈 유인을 줄이고 있다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단절할 수 있을까어떻게 하면 농업·농민 문제가 우리 사회의 중대 문제로 다시 논의될 수 있게 될까?”(2012.2.27. 경향신문)

비정규직 청년 노동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 청년유니온을 찾은 그의 칼럼은 이렇게 시작된다세 명의 청년유니온 조합원들의 이력과 노동 조건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다.

총선을 앞둔 지금필자는 두 가지 의문을 갖는다하나는 복지나 재벌개혁과는 달리 비정규직 문제는 왜 중대 쟁점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다른 하나는 젊은 세대의 노동문제는 누가 대표하는가 하는 것이다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최근 나는 하급 서비스직 부문에서 시급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청년유니온’ 조합원들과 인터뷰를 가졌다.

이종필씨는 피자 배달 일을 했다유사 업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임금은 높았지만 오토바이 사고 위험이 컸다그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했고청년유니온 1기 조직팀장을 지냈다서유란씨는 해외 일자리를 찾기 위해 네일아트 기술을 배울 학원비를 충당하고자 대형마트 안에 있는 베이커리에서 일을 하는 시급 노동자였다이번에 청년유니온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이수민씨는 신용정보사의 정규직 직원이다월 120~130만원의 급여로는 부족해 퇴근 후 집근처 커피가게에서 일주일에4저녁 8시에서 새벽 1시까지 월 40~45만원의 추가 수입을 위해 일을 한다현재 청년유니온 홍보팀장이다대학 재학 시절 학생운동의 일환으로 청년유니온 창설에 참여했던 김형근씨는 24시간 편의점에서 주 3일 밤 11시부터 아침 8시까지 야간근무를 했다현재 청년유니온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이들로부터 듣는 청년유니온 이야기는내게는 무척 생소하면서도 매혹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2012.3.26. 경향신문)
최저임금 인상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청년유니온 조합원들(출처: 청년유니온)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놓인 이주노동자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이주노동자와 고용주지원단체 등에 대한 현장 취재를 두루 마친 뒤 그는 문제와 갈등을 회피하지 말고 실질적인 정책-제도적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뭐든 안 되는 것은 없다.”는 직설 속에 많은 것이 함축돼 있다.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복지체제가 있어야 한다그것은 정부가 할 일이다외국인노동자도 자신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사관계가 개선돼야 한다그것은 사용자단체와 노조가 나설 일이다외국인노동자 보호입법도 필요하다제대로 된 정당이라면 피해서는 안된다어느 나라든 외국인노동자 유입을 개방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일정한 제한이 없을 수 없겠지만고용주의 신원보증을 통해 고용허가를 연장해주는 제도를 도입할 수는 있다이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들은외국인노동자 청원을 전담 처리하는 지역노동위원회나 노동법원을 설치해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서비스부문이나 3D업종에서는 외국인노동자의 공급을 더 원하는 반면건설업에서는 내국인노동자의 고용기회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그것 역시 업종별 고용쿼터제를 두거나 노조와 사용자단체 간의 협의를 통해 풀어갈 수 있다뭐든 안 되는 것은 없다외국인노동자의 합법화를 위한 제도개선은 중요하다이 문제가 정책적 필요에서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도덕적 책임이기도 하다는 것을나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2012.4.23. 경향신문)

2회에 걸쳐 전국적으로 300만에 달하는 신용불량자 문제를 깊이있게 파헤친 최근 칼럼에서는 최근 심각한 전사회적 이슈가 돼온 통합진보당 사태와 연관지어 이렇게 결론내린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말할 것도 없이 신용불량자들을 위한 정치적 대표가 있어야 한다.오늘날 우리는 잘못된 이념적 급진주의에 의해 주도된 진보정치가 민중의 권익 증진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두고라도민주주의 그 자체에 해악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분명히 보고 있다.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신용불량자 문제를 진지하게 접근하는 데는 두 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다첫째는신용불량자 문제를 포함하여 금융정책을 실제로 다룰 수 있는 당의 제도와 조직체계를 조직하는 일이다이는 관련 이해당사자 집단예컨대 신용불량자비정규직 노동자복지수혜 대상자,청년 등이 정책 이슈 제기에서 아젠다 형성정책 대안 마련에 이르기까지 보다 더 가까이 참여하거나 접맥될 수 있는 방향으로 정당 활동의 체계가 달라지는 문제를 말한다당의 조직과 역할은 시민의 실생활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업에 부응할 수 있도록 변화되지 않으면 안된다.그렇지 않고서 진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을 뿐 아니라오히려 실제 사태를 못 보게 만드는 역기능이 될 수 있다.(후략)”(2012.5.18. 경향신문)

한림대 김순영 박사가 신용불량자 문제를 파헤친 책 <대출 권하는 사회>의 표지 사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