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바람이 거세게 정치권에 불고 있다. 정치권 밖에서 불기 시작한 바람이 정치권을 뒤집어 놓고 있다. 총선과 대선이 겹친 정치의 해에 느닷없는 외풍(?)에 시달리는 박근혜, 문재인을 비롯한 정치권 인사들이 애처롭게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정치의 경험이 전무한 안철수가 험난한 풍파를 헤치고 대선까지 완주할 것으로 쉽게 믿을 수는 없다. 다만 이번에 그의 저서 <안철수의 생각>을 출간함으로써 시작된 본격적인 정치행보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가 출판된 이후 지지도가 상승한 것은 안철수에 대한 불안감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그가 정치를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아마추어가 아니라는 사실이 전달되었다.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정치현안은 방향만 제시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뭔가를 이루려면 일개 서생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지겹고 고통스러운 정치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지난 대선 때 정운찬 고건 등은 그 첫걸음도 떼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삼권분립의 민주정치 틀 안에서 대통령도 임기 내에 새로운 정책을 실현하기란 쉽지 않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정치인들을 설득하고, 언론으로부터 인정받고, 이해당사자들의 동의를 얻어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는 것도 간단치 않은 일일뿐더러, 정책 집행의 과정에서 부딪히는 예산문제, 비리문제, 집단반발, 언론의 냉혹한 비판, 때로는 악의적 선동과 천재지변에 이르기까지 곳곳의 암초를 피해야만 한다. 안철수는 진정 이 길을 선택한 것인가, 또 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안철수의 정치적 진정성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다. 그의 정치노선이나 자질론 논쟁도 뜨겁지만, 역시 그가 대선에 출마해서 완주할 것인가 하는 점이 가장 큰 관심사다. 최근에 그의 대선출마 방식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가장 많은 27%의 응답자가 ‘민주당 대선후보와 단일화’를 꼽았다. 반면 독자창당이나 민주당 경선참여는 각각 21%와 20%에 그쳤다. 안철수식 정치는 그 출발부터 일반론을 깨고 있다. 그는 상식의 정치를 주창하고 있지만, 정작 그의 정치행보는 상식파괴로 가고 있다.
자기 세력이 없기 때문에 안철수의 정치는 아직까지 정치실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저서를 통해 안철수는 정치인의 ‘책임윤리’를 강조함으로써 그에 대한 불안감을 덜어주었다. 그는 막스 베버를 인용하여 정치인에게는 신념윤리를 넘는 책임윤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는 신념윤리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신념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안철수는 아마추어 정치인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신념이 없는 정치인은 죽은 정치인이라고 미국의 정치평론가 월터 리프만이 말했듯이 정치인에게 신념은 생명이다. 소신 없이 앵무새처럼 남의 얘기만을 반복하는 정치인은 아무일도 못하고 세금만 축내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신념만 내세우는 정치인은 국민에게 해악을 끼치게 된다. ‘어찌 이런 일이!’라고 사후에 후회해 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정당정치의 역사가 짧은 우리에게 이런 일은 종종 목격된다. 벤처기업 육성책이 젊은 사기꾼을 양산했고, 비정규직 보호책이 애꿎은 해고를 초래했으며, 해군기지건설은 주민반대에 직면했다. 정치인은 자신의 말과 더불어 자신이 추진한 정책의 결과까지 책임져야만 한다.
안철수에 대한 높은 기대를 정당정치의 퇴조나 정치불신으로 보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안철수는 국민들이 바라는 바를 대변하고 국민들이 우려하는 바를 공격하여 공감대를 넓혔다. 나아가 책임윤리를 강조함으로써 국민들이 불안하게 생각하는 경험부족을 보완했다. 이제 안철수는 국민의 기대치를 높여놓은 현상황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한다. 안철수의 정치력이 검증받을 때이다. 책은 잘 썼는데 여럿이 함께 하는 정치도 과연 잘 할 수 있을런지.
2012년 7월 30일 월요일
2012년 7월 25일 수요일
[자유너마저]책 '안철수의 생각'리뷰; 안철수에 대한 비판적 지지
유력한 대선주자이자 한국사회의 가장 큰 관심을 받는 인물, 안철수의 생각이 담긴 책이라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워낙 부지런한 분들이 많아, 겹치는 감상들은 생략하고 가장 하고 싶은 말들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1. 대통령 당선은 세력교체로 바라봐야 한다.
대선과 정치에 관한 안철수의 생각을 읽으면 배트맨이 떠오른다. 집권에 있어서 세력교체의 관점이 부재하다. 대통령 개인으로서 한국 사회를 충분히 바꿀 수 있다는 무의식이 깔려있는 듯 했다. 마치 배트카와 배트맨 변신복이 있으면 고담시를 구할 수 있을 거라 믿는 웨인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나 할까. 하지만 대통령이 되어 개인의 역량, 특히 소통과 합의의 능력으로 정치적 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다는 낙관론은 다소 나이브하고 위험하게 보였다. 한국의 대통령이 막강한 권한을 가진 것 처럼 보이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로는 검찰지휘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 둘째로 여당이 의회다수를 점할 경우 사실상 내각제의 수상 이상으로 대통령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국의 정치제도 때문이다. 안철수가 가진 기존 제도권 정치에 대한 불신과 비판은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 하지만 안철수가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어떤 세력과 함께 나아가야할지 구체적인 고민과 연대지점, 연대의 방식을 생각해야 한다. 분점정부 하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얼마나 비루한 신세에 놓였었는지를 떠올려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번에 출범한 19대 국회는 새누리당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안철수가 행여 대통령이 되면 사실상 분점정부의 형태에서 국정을 운영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개혁안은 기득권과 맞닿아 있는 새누리당의 강한 반발에 부딪힐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때문에 어떤 세력과 연합하고, 의회에서 어떤 정치를 통해 우위를 되찾아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막연히 자신의 소통과 합의 능력이 대통령직과 결합했을 때 구 정치체제의 구태를 타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나이브한 측면이 강하다.
#2. 권력행사에 대한 결심이 필요하다.
시사IN 252호에서 다루었듯이, 안철수가 대권에 대한 의사를 표명하도록 이끈 것은 그의 역사적 소명의식이다. 애초에 권력의지는 없는 사람이지만, 시대와 사회의 위기 속에서 자신의 역할이 주어지면 이를 수용한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론 이러한 역사적 소명의식에 철저하기만 해도 안철수는 충분히 대통령이 될 추진력을 가졌다고 본다. 하지만 문제는 집권 이후다. 사실, '소통과 합의를 추구한다'는 그의 말과 '비상식에 맞선 상식을 추구한다' 그의 말은 모순적으로 보인다. 비상식과 소통과 합의를 모색할 수 있는가? 안철수라면 해낼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비상식과의 타협에는 비관적이다. 그가 사실상 대통령직을 생각하고 있다면, 비상식에 대해 자신이 가진 권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해야한다는 결심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참여정부 시절대통령이 권력의 부작용을 우려해 주어진 권력을 소극적으로 행사한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검찰이 개혁되지 못했고, 사학법이 좌초되었고 조중동 프레임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지난 4년 일들이 이후 한국사회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미쳤는지를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다. 비상식에 대해 그가 철저히 권력의지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그러한 결심이 있어야 한다.
#3. 안철수, 생각이 아닌 삶으로 평가 받아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철수는 분명 우리 나라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별 특별할 게 없는 '안철수의 생각'을 읽고 실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 가지 점에서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그의 정책 아젠다는 색다를게 없고, 원론이 많고 각론이 부족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있어 탁월하고, 균형잡힌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념에 함몰되거나, 사회에서의 성공에 쩌들어 있거나, 과거의 복수심에 함몰되어 있지 않다. 그는 이념, 지식, 경험에서 균형잡힌 자세로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더불어 그것이 참모진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만의 거대한 로드맵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리더로서 탁월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특히 새로운 체제가 요구되는 다음 정권에서 이러한 그의 역량은 한국 사회의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둘째로, 그가 가진 대중성은 단순히 그가 가진 정치관과 지식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단순한 팬텀도 아니다. 대중은 그의 삶 자체가 이 시대에 필요한 패러다임을 선구적으로, 성공적으로 실현시켜온 과정이었기 그에게 열광한다고 봐야한다. 특히 그가 가진 소통과 이해, 공감의 능력은 책 한권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핵심적으로 그가 가진 탁월한 소통, 이해, 공감능력이 안철수를 훌륭한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다. 그가 가진 약점으로 국정 초반 난항을 겪더라도, 곧 그가 가진 소통과 이해의 능력으로 보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역사적 소명의식에 갇혀 스스로를 지나치게 희생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아닌 걱정이 들 뿐이다. 그런 걱정을 제쳐둔다면, 그는 지금 나와있는 어떤 대선주자들보다 좋은 대통령이 될 자질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by 자유너마저
2012년 7월 24일 화요일
[BK칼럼] '안철수의 생각'에 답한다
1분에 27권씩 팔린다는 그 책을 샀다. 책이 나온 다음날 광화문 교보문고에서였다. 대선주자들의 책을 모아놓은 매대 위에 그 책이 없어서 서성이고 있는데, 한 사람이 불쑥 '안철수의 생각'을 올려놨다.
"방금 전까지 이 만큼 쌓여있었는데 다 어디갔죠?"
잠깐 들고가서 보는 사이에 매대의 책이 품절됐던 것이다. 어쨌든 덕분에 '초판 1쇄'를 손에 넣은 나는 남들보다 하루 이틀 먼저 그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사흘만에 독파한 '안철수의 생각'은 마치 '다크나이트 라이즈' 같았다. 전작 '다크나이트'가 높여놓은 기대감 때문일까? 시리즈의 완결판은 꽤 잘만든 블록버스터임에도 실망감이 앞섰다.
이 책도 그렇다. 한국 사회의 모순 부조리를 치유할 V3 백신이 담겨있길 기대했기 때문인지, 내용 자체는 기대에 못미쳤다. 복지와 정의, 평화의 가치를 내세우고, 자살률과 출산률로 한국 사회의 위기를 진단했지만, 어디선가 다 들어본 이야기다.
안철수의 전공분야라 할 수 있는 대기업-중소기업 문제와 경제민주화 부분은 원론적인 지적에 그쳤고, 디테일한 정책이 부족했다. 전속고발권을 가진 공정거래위에 대한 견제장치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전속고발권 폐지'로까지 나아가진 못했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핵심 영역인 외교안보에 대한 논의가 아예 실종됐고, 대북정책에 대한 접근도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양자를 비판하며 어정쩡한 중도 노선을 걷는 것 같다.
물론 좋은 아이디어도 있었다.
"성장을 해야 복지를 한다"가 아니라 "복지를 해야 성장도 된다"며 증세의 필요성을 언급한 점은 용기있다. 대법관을 종신화해 전관예우성 로비를 차단하고 국사 뿐 아니라 세계사를 필수로 가르쳐야 한다는 지적도 귀담아 들을만하다.
결국 안철수의 생각은 우리나라 야권 성향 지식인의 평균적인 관점에 수렴하고 있다. 그의 나이와 경험의 폭을 고려하면 빼어난 측면도 없지 않다.
안철수는 올해로 만 50세다. 그가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면 먼저 정치를 할 것을 권하고 싶다. 초선 국회의원이든 일개 부처의 장관(교육과학기술부 정도?)이든 국정운영 경험과 경륜을 쌓아주길 바란다.
안철수는 도전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고 했다. 지식인 안철수가 도전해야 할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정치 그 자체다. 대한민국 18대 대통령은 아직 그에게 버거워 보인다. 19대나 20대라면 지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것이 그의 생각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2012년 7월 12일 목요일
[이재준 칼럼] 정치에선 교사가 없다
미국 하바드의 학부 교육을 극찬하는 글이 이달의 정치평론이 됐다. 핵심은 고전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교육의 과정의 우수함이다. 그리고 이를 교수와 조교가 나서서 피드백을 해준다는 점을 들어 동경하는 모습까지 드러난다. 그러면서 한국엔 이게 없다고 비판한다. 결론은 "미국엔 있고 한국엔 없다". 감히 말하건데 이러한 자세는 미국에서 유학을 한 이들이 극히 경계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식민지 지식인의 한계다.
이들은 흔히 미국의 정치와 정치학을 동경하다 정작 한국을 비하하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미국 유학 시절엔 미국 하원 인턴을 자랑스럽게 하면서도 한국 국회나 선거에서 잠깐 동안이라도 참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바마의 선거운동엔 참여하면서도 정작 자기가 살아온 한국의 노무현은 무관심하다. 미국에 있어보니 한국은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걸 나중에 이유로 가져다 붙이곤 한다.
충격은 하바드 학생들이 고전을 열독하는 모습이 아니다. 그 모습을 왜 한국에서 보지 못했냐는 거다. 왜 미국만 가면 한국에서 했던 소중한 경험들은 그렇게 깡그리 잊어먹느냐는 거다. 니체는 이미 2000년대 전집이 나왔다. 이후에도 니체 전집이 여러 출판사가에서 독일어 원전이 번역되어 출간됐다. 서울대 도서관에도 여러 종류의 번역본이 있다. 도덕의 계보, 비극의 탄생,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을 보라 등 니체의 저작을 섭렵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이미 1970년대에 나온 각종의 우수한 번역본이 서울대 도서관엔 즐비하다.
고전 읽기는 이미 한국의 서울대 정치학과에도 흔한 풍경이다. 내 친구이자 정치학도 원세일 학우는 전집으로 나온 도스트예프스키를 두달에 걸쳐 섭렵하는 걸 옆에 지켜보며 경탄한 기억도 있다. 정치학과 1학년 1998년 3월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독일어 원전으로 읽는 선배도 봤다. 1995년에 정치학과에 들어온 한 선배는 유학 고전에 능통했다. 1980년대 초 선배들은 헤겔을 일본어 번역본으로 구해 탐독했다고 한다. 정치학과 95학번인 정영태 선배와 김재영 선배의 자취방에 갔다가 본 1000여권의 고전들이 벽면을 가득 채운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도대체 뭐가 더 충격인가? 교수나 조교가 수업에서 시켜서 고전을 읽는 미국 하바드 학생들이 충격인가? 아니면 정치학에 대한 사명감 때문에 스스로 고전을 읽고 선후배끼리 토론하고, 그게 응어리져 글을 쓰는 과거의 정치학과에서 벌어진 일상이 충격인가? 지금도 학부 후배들은 고전을 읽는다. 사회계약론, 자유론, 국가, 정치학 등 고전들은 서울대 정치외교학부에서도 다 섭렵하는 고전들이다. 오히려 지금 학부생들은 교수가 시키기만 하면 예전보다 매우 열심히 읽는다. 교수들이 학부생들을 가르치고자 하는 열정도 크다. 이점에서라면 하바드 못지 않다. 그리스 비극을 교양 수업에서 섭렵한 적도 있다.
지금의 서울대 정치외교학부나 하바드나 정치학의 가장 본질적인 전제는 주체이다. 수업 실라버스에서 나오지 않아도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찾아서 공부하던 주체가 핵심이다. 그리고 그런 주체들이 공론장을 만들어 토론하는 게 본질이다. 서울대 정치학과 학부에선 이미 그렇게 해왔다. 다만 그 전통이 사라져 다시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뿐이다.
미국 대학이 왜 그렇게 텍스트에 집착하는지 아는가? 식민지이기 때문이다. 영국 캠브리지에 유학중인 김동규 선배는 영국 대학에선 텍스트 읽기 보다는 토론과 글쓰기를 중시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필요하면 텍스트를 본다. 이게 제국인 영국과 식민지였던 미국의 차이다. 조선시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조선의 유학자들의 글엔 중국의 고전들이 숱하게 등장한다. 미국에서 읽히는 고전이라는 게 결국 유럽의 책들이다.
미국을 움직이는 건 정치학이 아니다. 법학이다. 미국에서 정치학은 법률가를 위한 교양과목일뿐이다. 이는 미국 정치학의 한계 때문이다. 미국 정치학이 방법론에 매달려 현실적인 문제와 멀어지는 사이 미국의 법학은 보통법의 전통에 따라 구체적인 생활 세계의 문제에 천착한다. 영국의 최고 엘리트는 정치사, 경제사 등 역사를 전공한다. 그럼에도 하바드 학부가 그렇게 대단한지 나는 모르겠다.
2012년 7월 10일 화요일
[BK칼럼] 지검장 직선제가 킹핀이다
영화 '다크나이트'에서 조커에 이어 베트맨의 적으로 등장한 '투 페이스 하비'는 고담시의 선출직 검찰총장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어둠 속에서 활약하는 베트맨이 '어둠의 기사'라면 시민에게 선출되 정정당당하게 거악과 맞서 싸우던 그는 '빛의 기사'라고 할 만하다. 비록 영화 속에서는 불행한 최후를 마쳤지만 베트맨은 오히려 자신보다 그가 진정한 고담시의 영웅이라며 그를 치켜세웠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아칸소 주지사 이전에 아칸소의 검찰총장이었다. 우리로 치면 제주도 지검장 정도의 지위였다.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클린턴은 아칸소 검찰총장으로 선출되면서 주지사 출마의 발판을 마련했고 결국 세계 최고의 권력자로 도약했다.
'견찰', '떡검', '색검'에 '스폰서 검사'까지 검사에 대한 비난이 봇물을 이루는 우리나라에서 보면 정말 다른 나라 이야기다. 같은 검찰인데도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싶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검찰총장 임명권 국민에게 돌려줘야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돈과 권력이다. 대통령이 법무부장관을 임명하고 법무부장관이 검찰총장을 임명하는 구조에서 검찰은 자신의 임명권을 가진 위를 쳐다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민이 선출하는 검찰은 국민을 쳐다보게 된다.
국민이 원한다면 현직 대통령의 비리를 파헤치고 삼성과 대결하는 검사가 나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인기를 얻은 검찰총장이 국회의원이나 도지사, 대통령이 되는 시대도 올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대통령의 눈에 들어 여당 공천 받는 것이 기대할 수 있는 전부다.
선거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하지만 교육감 직선제를 보자. 김상곤 교육감과 곽노현 교육감이 선출되면서 수도권의 만연한 교육계 부패가 자취를 감췄다. 무상급식 논란도 따지고 보면 민주당이 아닌 김상곤 교육감에서 비롯됐다.
로스쿨 졸업생들에게도 검찰총장 직선제는 새로운 희망이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출세의 기회가 열린다면 무료 변론이나 시민운동으로 뛰어드는 변호사도 많아질 것이다. 그야말로 정책 하나를 바꿈으로서 주변의 선순환을 유발하는 볼링의 킹핀이라 할만하다.
가장 큰 적은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
가장 큰 장벽은 정치에 대한 불신과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주의다. 선거가 많으면 세금 낭비라며 총선과 대선 주기를 합치자는 주장이나 투표용지가 너무 많아서 로또 선거로 흐른다는 국민 무시의 발상이 그것이다. 선거가 많다면 다음 총선 날짜에 지검장 선거를 같이 치루면 된다. 투표용지도 현재 총선 후보자와 정당에 대한 투표 2장에 지검장 후보가 포함되 3장으로 늘 뿐이다.
마침 올해는 대선이 있다. 대선 후보가 이를 대선 공약으로 걸고 국민 앞에서 대논쟁을 벌여야 한다. 71년 김대중의 향토예비군 폐지 공약이나 2002년 노무현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처럼 승패를 가르는 대논쟁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과정 자체가 검찰의 의무와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기는 소중한 국민적 교육의 장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더 많은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각 지방검찰총장의 임명권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 옳다. 잃을 것은 떡검과 견찰이고 얻을 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다.
2012년 7월 9일 월요일
[자유너마저] 검찰권력 나눠야 대통령 측근비리 사라진다.
대통령 임기말 측근비리는 일종의 연례행사가 된 듯 하다. YS 시절에는 김현철이 있었고, DJ 시기에는 두 아들이 휘말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MB도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고 우겨보았지만 그 역시 레임덕에 쳐한 임기말 대통령의 가혹한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끝임없는 대통령 측근 비리의 원인에 대한 진단은 다양하다. 그 중 한 가설이 바로 '제왕적 대통령' 설이다. 우리 나라의 대통령이 권한이 너무나 막강하기 때문에, 대통령 주변의 권력의 부패는 필연적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건 반만 맞는 말이다. 우리 나라의 대통령이 가진 권한은 다른 나라의 대통령들과 비교했을 때 '제왕적'일만큼 큰 편은 아니다. 사실 대통령은 제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워낙 많은 권한을 가진 직책이기 때문이다. 명색이 한 나라 행정부의 수장이 아닌가.
하지만 대통령 측근 비리의 줄기찬 반복은 결국 대통령 권력에 대한 견제의 부족이라는 지적은 정확하다. 하지만 견제받아야 할 구체적인 권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대통령의 검찰 지휘권이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반복되는 임기말 대통령 측근 비리는 폐쇄성과 자체적 정치성을 띠는 검찰조직, 그리고 대통령의 검찰 지휘권 독점의 결합의 산물이다. 이러한 결합은 임기 초반 대통령이 많은 지지를 얻는 경우에는 대통령이 검찰지휘권을 강력히 행사하고, 검찰은 대통령을 위해 철저히 복종하는 자체적인 정치논리를 따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반대로 임기 말 레임덕을 맞아 대통령이 흔들리게 되면 검찰은 임기 기간 동안 '쌓아두었던' 측근 비리들을 터트리면서 다시금 정의의 사도로 변신한다. 이것이 지난 20년 간 반복되어온 대통령 측근 비리의 역사다.
결국 대통령 측근 비리의 해소가 검찰개혁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문재인의 주장은 맞는 얘기다. 하지만 그 변화의 핵심은 검찰조직 자체를 바꾸는 것 보다, 검찰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에 맞춰져야한다. 검찰조직의 자생적인 정치논리를 통제하기 위해선 대통령이 보다 강력하게 검찰을 통제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아이러니하게 대통령과 검찰의 유착을 더 강화시킬 위험성도 내포한다. 따라서 검찰조직의 문제와 대통령 측근 비리를 동시에 해소하기 위해선, 양자를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조사할 수 있는 제3의 수사기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수사기관은 대통령과 검찰로부터 자유로우며, 검찰과 동등한 지위(조사와 기소권한)를 부여받아야만 제 기능이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대통령과 검찰로부터 자유로운 제3의 수사기관은 검찰과 같이 정치논리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대통령의 인기여부와 상관없이 소신있게 권력형 비리를 수사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검찰의 정치적 태업이나 편파적 수사를 견제하는 역할도 수행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통령 측근 비리는 지속적인 견제에 의해 줄어들 수밖에 없으며, 설령 발생하더라도 임기말에 봇물 터지듯 등장하는 일은 적어질 것이다. 더불어 검찰조직의 부패와 편파성을 시정하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며, 검찰이 '경쟁상황'에 놓이면서 더 적극적인 사회공헌에 나서도록 촉진할 수 있을것이다. 물론 이 새로운 기관 역시 검찰의 견제를 받음으로써 그 공정성을 유지해 나가야 할 것이다. 분산된 권력은 상호 간의 견제가 이루어질 때 양자 모두의 부패를 막을 수 있다.
대통령 측근 비리의 반복은 대중적으로 권력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정치에 대한 혐오를 부추긴다. 그리고 권력에 굴종했던 검찰이 자신들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뻔하지만 먹히는 시나리오'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다. 이제는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해결책이 모색되어야 할 시점이다. 개인적으로는 검찰권력의 분립을 위한 제3의 수사기관 도입이 이번 대선에서 중요한 이슈로 간주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by 자유너마저
2012년 7월 6일 금요일
[MH칼럼] 美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의 지혜로운 결정
- 오바마 의료보험 개혁안(Obamacare)을 살려낸 로버츠 대법원장의 정치적 지혜
2012년 6월 28일, 미국은 의료보험 개혁을 둘러싼 지난 100여 년 간의 지난한 논쟁을 일단락 짓는 위대한 순간을 맞이하였다. 의료보험 개혁안의 위헌여부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키를 쥐고 있던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이 마침내 자유주의자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연방대법관 5:4의 결정으로 의료보험 개혁안이 그 생명력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사실,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은 보수적인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분류되고 있었으며, 연방대법관들의 정치성향은 보수-진보의 기준으로 평가하였을 때 보수(5명) v. 진보(4명)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진보적인 정책인 의료보험 개혁안(Obamacare)이 연방대법원의 위헌법률심사(judicial review)를 과연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우려가 있었다.
법관들의 정치적 성향이 보수적인 경향을 띄는 것은 미국만의 독특한 특징이 아니다. 법관들은 법률이 사회질서 유지의 최후의 보루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법관은 질서의 수호자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과 사명감은 시민들이 법관에게 기대하는 역할이기도 하다. 하지만 법관들이 법적인 판단의 영역을 넘어서서 정치적 판단의 영역에 정파적인 입장을 관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치의 영역이지, 사법의 영역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법이 정치의 영역에 부당하게 관여할 때, 정치는 후퇴하며 사법은 타락한다.
미국의 고급정치평론지 뉴리퍼블릭(TNR)은 사설과 정치평론을 통해 의료보험 개혁안 위헌논쟁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연방대법원의 역할과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강조하였다.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연방대법원에 부여한 권한은 헌법에 배치되는 의회의 입법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었다. 따라서 연방대법원은 오직 헌법과 법 논리에 기초하여 의회에서 만들어진 법률을 심사할 수 있을 뿐이다. 법률의 위헌심사(judicial review)의 과정에서 개별 법관들의 정치적 성향을 반영시키는 것은 삼권분립의 정신에 위배되며, 사법부가 스스로에게 부여되지 않은 권한을 사용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리는, 나아가 공동체의 건강함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은 이러한 한계지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좀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픈 유혹을 잘 이겨내었다. 로버츠는 판결문에서 “의료보험 개혁안이라는 정책이 올바른 정책인지, 아니면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는 정책인지를 결정하는 정치적 판단의 권한은 사법부에 있지 않다. 그 결정은 국민이 직접 투표를 통해 선출한 정치지도자들의 손에 맡겨진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난제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입법부와 사법부 사이의 힘의 균형을 조정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만약 연방대법원이 의료보험개혁안을 위헌으로 결정한다면, 의회에서 오랜 논의와 숙고의 과정을 거쳐서 민주적으로 결정된 수많은 정책들이 연방대법원의 단 9명의 판사들의 손에서 유지되거나 폐기될 수 있는 위험을 초래하게 된다. 사람들은 특정 정책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연방대법원으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정치의 기능을 마비시키며, 사회적 대혼란을 가져올 것임이 명백하다. 이는 곧 판사들이 그들의 힘을 사려 깊게 사용해야 하는 이유이다.
반대로 연방대법원이 의료보험 개혁안을 합헌으로 결정한다면, 의회는 무제한적인 힘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이 주로 주장한 것이지만) 의회가 모든 시민들에게 의료보험을 갖도록 명령할 수 있다면, 같은 권한으로 의회가 모든 시민들에게 브로콜리를 사도록 명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시민의 자유에 대한 의회권력의 부당한 침범으로 해석된다.
보수주의자들이 의료보험 개혁안에 극렬하게 반대한 것도 바로 이 ‘이행명령’(mandate)이라는 방식 때문이었다. 의료보험 개혁안에 따르면, 모든 미국시민들은 국가 의료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하도록 규정되며(mandated) 이를 어길시 벌금(penalty)이 부과된다. 보수주의자들은 시민들이 의료보험을 구매할지 말지는 스스로가 시장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이지, 국가가 의무적으로 그것을 구매하라고 규정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조치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의회가 시민들에게 이러한 ‘이행명령’(mandate)을 분별없이 남발하는 상황, 예컨대 브로콜리를 사도록 지시하는 상황에 대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도 크게 우려하였다.
어느 쪽의 손도 쉽사리 들어줄 수 없는 딜레마의 상황에서, 로버츠는 아주 기발하고도 현명한 방책을 떠올렸다. 이 방책으로 인하여 연방대법원은 의료보험 개혁안의 실질적인 기능은 유지하면서도, 의회가 무제한적으로 이행명령(mandate)을 남발하는 사태는 방지할 수 있었다.
로버츠는 의회가 시민들로 하여금 시장에서 무엇을 거래해도 되는지를 일정부분 규제(regulate) 할 수는 있지만, 무엇을 구매하도록 명령(mandate)할 권한은 없다고 판시하였다. 예컨대 의회는 시장에서 마약이 거래될 수 없도록 규제(regulate)할 수는 있지만, 모든 시민들이 건강을 위해 브로콜리를 구매하도록 명령(mandate)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로버츠는 새로운 의료보험체계 속에서 미가입자들에게 부과되는 비용이 위법한 행위에 따르는 벌금(penalty)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공유하는 책임에 따른 부담(the shared responsibility payment)의 성격을 지닌 세금(tax)의 의미를 지닌다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국회는 종종 사람들에게 금연을 권고하기 위해 담배세와 같은 세금을 부과한다. 로버츠는 “조세법 체계 하에서 의료보험 의무가입조항(individaul mandate)를 유지하는 것은 어떠한 새로운 연방정부의 권한을 신설하는 것이 아니며, 의회가 이미 가지고 있는 권한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의회 권한의 한계지점을 명확하게 설정하였다.
이러한 로버츠의 해석은 상당히 대담하고 용기 있는 행위였음이 분명하다. 의회가 그 스스로 ‘의무가입 조항’(individual mandate)을 ‘개인들에게 의료보험을 구매하도록 명령하는 것’(commands individuals to purchase insurance)이라고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명령(command)은 헌법정신에 위배되며 대신에 ‘의무가입 조항’은 시민으로서의 공유된 책임을 지는 행위, 즉 납세의 의무 속에 포함된다는 독자적인 해석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로버츠는 판결요지(Syllabus)에서 이러한 해석을 기능주의적 접근(a functional approach)라고 다음과 같이 당당히 밝히고 있다: “이러한 법원의 결정은 기능주의적 접근이다. 그것은 의회가 의무가입 조항의 명칭을 무엇으로 명명하였는지에 관계없이, 그것의 실제적인 기능과 적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은 이번 판결을 통해 먀셜 판사와 홈즈 판사가 세운 美 연방대법원의 위대한 전통을 계승하는 최고의 법관의 반열에 올라섰다. 연방대법원은 현명하고도 균형 잡힌 판결을 통해 사법부와 입법부의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새롭게 정립하였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이 판결로 인하여 그동안 의료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수 백 만 명의 미국인들이 새롭게 의료보험의 혜택범위 속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방법상의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3억 명의 미국인을 포괄하는 세계 최대의 새로운 사회적 프로그램이 무사히 첫 발을 내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위대한 결정은 사법부에 부여된 법률해석의 권한 속에서, 당파를 초월하여 보다 실용적이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은 사법부가 가진 조그마한 권위의식을 포기함으로써 공동체가 한 단계 훌륭하게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연방대법원 판결요지(Syllabus)의 감동적인 마지막 문구를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법원이 헌법에 위배되는 법령에 직면하였을 때, 법원은 의회의 입법정신을 최대한 존중하고 지켜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을 무조건 파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When a court confronts an unconstitutional statute, its endeavor must be conserve, not destroy, the legislation)
※ 참고문헌
· 美 연방대법원 판결문(National Federation of Independent Business et al. v. Sebelius, Secretary of Health and Human Services, et al.)
· Ronald Dworkin, “Why the Health Care Challenge is Wrong”, New York Review of Books, April 2, 2012.
· The Editors, “Judgment day”, The New Republic, April 20, 2012.
· Jonathan Cohnmay, “Why the Justices Should Be Careful, The New Republic, May 1, 2012
· Robert Barnes, “Supreme Court uphold Obama’s health-care law“, The Washington Post, June 28, 2012.
· Linda Greenhouse, “A Justice in Chief“, The New York Times, June 2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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