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바드의 학부 교육을 극찬하는 글이 이달의 정치평론이 됐다. 핵심은 고전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교육의 과정의 우수함이다. 그리고 이를 교수와 조교가 나서서 피드백을 해준다는 점을 들어 동경하는 모습까지 드러난다. 그러면서 한국엔 이게 없다고 비판한다. 결론은 "미국엔 있고 한국엔 없다". 감히 말하건데 이러한 자세는 미국에서 유학을 한 이들이 극히 경계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식민지 지식인의 한계다.
이들은 흔히 미국의 정치와 정치학을 동경하다 정작 한국을 비하하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미국 유학 시절엔 미국 하원 인턴을 자랑스럽게 하면서도 한국 국회나 선거에서 잠깐 동안이라도 참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바마의 선거운동엔 참여하면서도 정작 자기가 살아온 한국의 노무현은 무관심하다. 미국에 있어보니 한국은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걸 나중에 이유로 가져다 붙이곤 한다.
충격은 하바드 학생들이 고전을 열독하는 모습이 아니다. 그 모습을 왜 한국에서 보지 못했냐는 거다. 왜 미국만 가면 한국에서 했던 소중한 경험들은 그렇게 깡그리 잊어먹느냐는 거다. 니체는 이미 2000년대 전집이 나왔다. 이후에도 니체 전집이 여러 출판사가에서 독일어 원전이 번역되어 출간됐다. 서울대 도서관에도 여러 종류의 번역본이 있다. 도덕의 계보, 비극의 탄생,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을 보라 등 니체의 저작을 섭렵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이미 1970년대에 나온 각종의 우수한 번역본이 서울대 도서관엔 즐비하다.
고전 읽기는 이미 한국의 서울대 정치학과에도 흔한 풍경이다. 내 친구이자 정치학도 원세일 학우는 전집으로 나온 도스트예프스키를 두달에 걸쳐 섭렵하는 걸 옆에 지켜보며 경탄한 기억도 있다. 정치학과 1학년 1998년 3월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독일어 원전으로 읽는 선배도 봤다. 1995년에 정치학과에 들어온 한 선배는 유학 고전에 능통했다. 1980년대 초 선배들은 헤겔을 일본어 번역본으로 구해 탐독했다고 한다. 정치학과 95학번인 정영태 선배와 김재영 선배의 자취방에 갔다가 본 1000여권의 고전들이 벽면을 가득 채운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도대체 뭐가 더 충격인가? 교수나 조교가 수업에서 시켜서 고전을 읽는 미국 하바드 학생들이 충격인가? 아니면 정치학에 대한 사명감 때문에 스스로 고전을 읽고 선후배끼리 토론하고, 그게 응어리져 글을 쓰는 과거의 정치학과에서 벌어진 일상이 충격인가? 지금도 학부 후배들은 고전을 읽는다. 사회계약론, 자유론, 국가, 정치학 등 고전들은 서울대 정치외교학부에서도 다 섭렵하는 고전들이다. 오히려 지금 학부생들은 교수가 시키기만 하면 예전보다 매우 열심히 읽는다. 교수들이 학부생들을 가르치고자 하는 열정도 크다. 이점에서라면 하바드 못지 않다. 그리스 비극을 교양 수업에서 섭렵한 적도 있다.
지금의 서울대 정치외교학부나 하바드나 정치학의 가장 본질적인 전제는 주체이다. 수업 실라버스에서 나오지 않아도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찾아서 공부하던 주체가 핵심이다. 그리고 그런 주체들이 공론장을 만들어 토론하는 게 본질이다. 서울대 정치학과 학부에선 이미 그렇게 해왔다. 다만 그 전통이 사라져 다시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뿐이다.
미국 대학이 왜 그렇게 텍스트에 집착하는지 아는가? 식민지이기 때문이다. 영국 캠브리지에 유학중인 김동규 선배는 영국 대학에선 텍스트 읽기 보다는 토론과 글쓰기를 중시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필요하면 텍스트를 본다. 이게 제국인 영국과 식민지였던 미국의 차이다. 조선시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조선의 유학자들의 글엔 중국의 고전들이 숱하게 등장한다. 미국에서 읽히는 고전이라는 게 결국 유럽의 책들이다.
미국을 움직이는 건 정치학이 아니다. 법학이다. 미국에서 정치학은 법률가를 위한 교양과목일뿐이다. 이는 미국 정치학의 한계 때문이다. 미국 정치학이 방법론에 매달려 현실적인 문제와 멀어지는 사이 미국의 법학은 보통법의 전통에 따라 구체적인 생활 세계의 문제에 천착한다. 영국의 최고 엘리트는 정치사, 경제사 등 역사를 전공한다. 그럼에도 하바드 학부가 그렇게 대단한지 나는 모르겠다.
정신이 버쩍 드는 코멘트이네요. 마치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 날렸던 따끔한 일침들 같은... 김홍우 선생님께 호되게 혼날때 느꼈던 감정들이 되살아나요...^^
답글삭제정치학과 예전 선배들의 주체적인 고전독서와 토론의 전통을 다시 환기시켜주셔서 감사해요. 여기에 소개된 선배님들을 꼭 한번 만나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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