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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평론 쓰기모임(시민적 글쓰기 포럼)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정치적 글쓰기(political writing)를 훈련하는 공간입니다.
2012년 11월 11일 일요일
2012년 10월 24일 수요일
[김대영 칼럼] 누구를 위한 정권교체인가?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런 전제 없이 정권교체의 당위성만을 내세운다. 1997년 DJ에 의한 정권교체 당시 이를 “평화적 정권교체”라고 부르며 벅찬 감동을 맛보았던 나로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국민의 정부 기간 중에 발생한 경제정책의 난맥상, 나아가 참여정부 시절에 경험한 권력의 한계를 생각할 때 정권교체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정권교체 지상론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정권교체 지상론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정책대결이 갖는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한다. 한국정치의 현실에서 선거공약이 갖는 비중이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할 때 작은 것은 사실이지만, 설사 선거공약이 휴지조각이 되는 경우라도 선거공약은 큰 틀에서 이후 정당의 정책노선을 이끌어간다. 실제로 노무현의 ‘수도이전’ 공약과 DJ의 ‘햇볕정책’ 공약, 최근 박근혜의 ‘경제민주화’ 공약 등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정책대결은 그 자체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정권교체 지상론의 더 큰 문제는 국민의 힘에 근거하지 않고 개혁이 가능하다는 망상을 유포하는 데 있다. 민주주의의 주권자가 국민이라는 식상한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한국사회를 한걸음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국민 다수의 적극적인 동의가 필요하다. 국민의 뜻이 모이지 않은 상태에서 재벌개혁, 관료개혁, 정치개혁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지난 25년간의 경험에서 충분히 보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일화해서 정권교체하자는 구태의연한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거꾸로 정권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우리 사회의 개혁을 저해한다. 국민이 감동하고 국민이 동의하며 나아가 국민이 나서게 만들 때 지 비로소 대한민국은 변화한다. 국민을 제쳐둔 단일화론자들은 사회개혁을 위한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기득권자를 위한 정권교체를 추구할 따름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들의 바램과 달리 그 결과는 국민의 외면과 정권교체의 실패일 수밖에 없다.
2012년 10월 12일 금요일
[BK칼럼] 2012 대선 삼국지…신천하삼분지계
삼국지에서 대세를 가른 것은 관도 전투였다. 관우가 안량과 문추를 베면서 원소군의 예봉을 꺾었고, 조조가 오소의 군량을 불태우는 것으로 원소의 야망은 무너졌다. 그것으로 천하는 결정되었다.
이후 아무도 조조의 천하통일을 의심하지 않았다. 유비는 형주의 식객에 불과했고, 강동은 손견과 손책이라는 걸출한 두 지도자를 연달아 잃었으며 손권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애송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제갈량은 이런 조조의 대세론을 일거에 뒤집는다. 천하 삼분지계다. 기존에 전혀 눈여겨보지 않았던 촉을 유비의 근거지로 지목해 제3세력으로 우뚝 세운다. 이로써 하나였던 천하는 3등분되고, 천하를 다 가졌던 조조의 세력은 3분의 1로 축소되고 만다.
2012년 대한민국 대선을 앞둔 상황도 비슷하다. 지난 총선으로 사실상 다음 정권은 결정된 것이었다. 누가 당선되든 새누리당 과반의 국회가 허용하는 정책만 할 수 있다. 더구나 '경제민주화'로 좌클릭한 박근혜는 그야말로 부동의 1위였다.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의 양자 대결에서 박근혜를 앞세운 산업화세력이 지리멸렬한 민주화세력을 압도한 것이다. 박근혜의 100만 대군이 신야성 앞까지 당도한 듯 했다.
하지만 안철수가 나타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미래세대'인 청년을 대선판에 끌어들였다. 어차피 투표안할 세대였던 청년층이 대선판에 끼어든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의 지지율은 다시 3분의 1로 축소되었다. 바야흐로 신 천하삼분의 시대다.
다시 삼국지로 돌아가보자. 적벽대전의 승리 요인은 유비와 손권의 굳건한 동맹이었다. 마찬가지로 2012 대선에선 미래세대와 민주화세대가 힘을 합쳐야만 산업화세력에 승리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유비와 손권 진영을 중재했던 노숙과 같은 인물이다. 한쪽에 몸을 담고 있더라도 양측 모두로부터 덕망과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중재자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송호창 의원의 탈당은 뼈아프다. 노숙이 갑자기 손권을 배신하고 유비 진영에 투항했다면 적벽의 연대가 가능했겠는가?
결국 오와 촉이 몰락한 것은 손권이 형주를 취하고 관우를 죽였기 때문이다. 이에 격분한 유비가 70만 대군을 몰고 오나라에 쳐들어갔다가 대패하며 양국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여전히 강력한 위나라를 두고 작은 욕심 때문에 적전분열한 것이 대사를 그르친 것이다.
지금 문재인과 안철수 캠프도 마찬가지다. 민주화세대과 미래세대가 협력하지 못하고 주도권 다툼만 벌인다면 대권은 박근혜에게 돌아간다. 단일화를 둘러싼 난투 끝에 안철수가 탈락한다면 미래세대는 아마 대거 투표에 불참할 것이다.
역사가 주는 교훈은 간단하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박근혜는 여전히 막강하다. 문재인과 안철수를 적벽의 승리로 인도할 노숙과 제갈공명은 없는 것인가?
2012년 9월 17일 월요일
[인태영 칼럼] 문재인 후보는 '실패한 정책'을 반복하려 하는가?
* 부제 : ‘일자리’와 ‘노사정 사회적 합의’의 재검토
문재인 후보는 "일자리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다. 민주통합당 후보로 확정되자‘일자리가 먼저입니다' 간담회에 참석했다. 간담회에서 문 후보는 "일자리는 국민의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이며, "성장의 결과도 일자리여야 하고 경제민주화의 성과도 안정된 일자리로 귀결될 것"이며, "좋은 일자리를 더 만들고, 기존의 좋은 일자리는 나누고, 나쁜 일자리는 좋은 일자리로 바꿔야 한다"고 하면서, "일자리가 정책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양보와 타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노(勞)ㆍ사(社)ㆍ정(政)은 물론 노ㆍ노 간의 사회적 대타협을 강조했다.
‘온전한 일자리’가 늘었으면 좋겠다는 후보의 충정은 이해한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온전한 일자리’는 계속 줄어들었다. ‘온전하지 못한 일자리’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대외 수출의존도가 높은 산업구조에서, 전 지구적 대공황 초입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고, 그나마 수출장벽을 피하면서 상대적으로 저임금인 곳으로 일자리는 이동했으며, 이윤율 저하와 디플레적 상황에서 자본을 쌓아놓고 투자에 소극적인 ‘자본의 파업’, 그리고 정보통신 혁명에 따른 무인자동화 진전 등등 그 이유는 복합적이다.
2007년 태통령 선거에서, 각 후보마다 일자리 300만개, 200만개, 심지어 민주노동당 후보마저 일자리 만들겠다고 했다. 다 공약(空約)이었다. 문 후보는 공허한 대열에 합류하려는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일자리와 노사정 사회적 합의가 중시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비율은 역전되었다. 양극화는 더 심화되었다!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사회적 합의’라고 하지만, 한국노총은 전통적 노동귀족을 대변했고, 민주노총은 전투적 조합주의를 통한 대기업 노동귀족을 대변했다. 비정규직은 번번히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이익을 위한 희생제물이었다. 그나마도 노사정위원회는 시종 파행을 거듭하며 식물화 되었다. 이쯤이면, ‘노사정 사회적 합의’ 노선은 실패한 정책 아닌가?
‘일자리’와 ‘노사정 사회적 합의’는 새로울 것 없는 많이 들어온 이야기,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실패한 정책 그대로다!
문재인 후보는 일자리는 어떻게 줄어들고 있으며,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성찰해야 한다. 대공황적 상황이 종료되고, 해외로 나간 일자리를 불러들이고, 자본의 투자가 일자리로 이어지고, 새로운 일자리 산업이 창출되는 등의 전망을 이끌어 내지 못한 상황에서 ‘일자리 대통령’은 2007년 공약의 재판일 뿐이다.
문재인 후보는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 ‘노사정위원회’와 ‘사회적 합의’가 왜 실패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시기에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을 기정사실화했고, 양극화를 심화를 막지 못했고, 노동단체는 자정능력을 키우지도 못했고, 무엇보다도 비정규직은 스스로를 조직화하지도 못했다.
차라리! 당장 일자리 만들기가 쉽지 않은 상황을 국민들과 함께 공유하고, 사회-복지-노동 정책으로 이 초유의 위기상황을 관리해야하지 않을까? 이제라도! 불평등과 특권유지로 점철된 ‘강요된 사회적 합의’에서 탈피하여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철폐’를 위한 입법을 약속해야 하지 않을까?
2012년 9월 12일 수요일
[MH 칼럼] 죽은 자의 책임과 산 자의 책임
박근혜 후보의 인혁당 관련 발언이 앞으로의 대선 정국에서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지, 혹은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채 조용히 묻혀버리고 말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과거에 대해 진지한 반성이 없이는 한 발짝도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일본 극우파들의 반성없는 역사인식을 보라.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뒤늦은 죄책감이 아니다. 잘못된 과거로부터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는 현재의 입장을 요구한다. 지나간 과거는 되돌릴 수 없겠지만, 적어도 다가올 미래의 비극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가라타니 고진은 <윤리2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뭔가 새로운 지점에 도달할 때 우리는 과거를 다시 본다. 그것은 죽은 자와의 관계 변화라고 말해도 좋다. 그 경우 죽은 자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변하는 것이다.” [11장. 죽은 타자와 우리의 관계]
20세기 초반,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저지른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의 주범들은 이미 모두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지금 일본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과거의 만행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은 이들의 잘못을 지금 산 자들에게 부당한 연좌죄의 형태로 부과하고 있는 것일까? 가라타니 고진의 입장에서 본다면, 선조들의 잘못을 후손들이 반성하고 사과해야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 가라타니 고진은 상당히 공감가는 설명을 제시한다. 위에서도 인용하였지만,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은 현재의 우리가 보다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과거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의 역사를 현재의 백인들이 반성하는 것이 아직 은연중에 잔존하는 오늘날의 인종차별적 행위들에 대한 일소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죽은 자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변해야 한다. 과거의 잘못을 그저 과거와 죽은 이들에게만 묻어둔 채 반성의 책임이 없음을 외치는 이들은 결국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책임은 잘못을 저지른 이후에 ‘처벌’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책임,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도 책임은 "지금 우리에게"도 분명히 존재한다.
2012년 9월 7일 금요일
[인태영 칼럼] 대통령 되기를 포기한 대통령 후보들
대통령 후보들에게, 국민들이 듣고 싶은 것은 지난 집권시절에 대한 성찰, 그 성찰이 녹아있는 정책, 그리고 세력(당) 쇄신방안 등이 아닐까? 그런데, 성찰도 없고, 성찰에 기초한 정책도 보이지 않고, 당 쇄신방안도 보이지 않는다.
여권의 박근혜 후보는 ‘광폭행보’를 보여주며 새 물결로 기존체제를 쇄신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면서, 기존 세력과 타협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 박근혜 후보가 그 어정쩡함으로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야권의 지리멸렬 때문일 것이다.
야권은 지난 총선에서 정파 간 나눠먹기로 패배했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그 산물, 그러니 대부분 쇄신대상이지 주체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손학규 정세균 후보는 당 대표를 지낸 사람들로서 기득권 체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재인 김두관 후보는 상대적으로 당 기득권 체제에서 자유로울 것 같았는데도, 쇄신을 주저하고 있다. 대통령이 되기를 포기한 대통령 후보처럼 굴고 있다.
상당수 야당의원들이 안철수 원장은 민주통합당에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되면 어찌될까? 민주화세력의 한 부분 대표했던 고 김근태 의원은 ‘교도소 담장을 걷는 기분’이라고 했고, 한명숙 대표는 ‘멘붕’을 보여주며 ‘무한책임’을 지겠다고 했지만, ‘최소한의 책임’도 진 것 없이 비례대표 국회의원직 버티고 있고, 이학영 의원을 비롯한 시민사회 출신들도 이 엄중한 시기에 도통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뜻을 품고 야당에 입문했었지만, 실패했다.
이제 안철수 원장이 달랑 남아있다. 아직 안철수 원장은 기존 정당 기득권체제에서 자유롭다. 그래서 국민들과 잘 소통하고 교감할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안철수 원장이라고 다를까? 안철수 원장마저 망가진다면... 또 한번의 기회를 상실하는 것 아니겠는가? 싹을 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죽이기는 쉽다. 그 싹을 살리는 정치를 기대한다. 민주통합당의 자기 쇄신부터 보여줘야 한다.
2012년 9월 2일 일요일
[MH칼럼] 상실의 시대 ③ : 한국 중산층의 몰락과 <최저임금제도>의 재조명(2)
우리는 ‘도전’이 상실된 사회에 살고 있는게 아닐까? 언제부턴가, 청년들에게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을 조언하는 것이 굉장히 현실-착오적이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의 실패가 영원한 나락으로 빠지는 사회에서 ‘도전’이란 그저 사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지난 15년간 우리 사회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는 감정은 아마도 ‘몰락의 두려움’ 이었다. 기업의 구조조정과 경제위기로 인해 발생한 실업은 건실한 중산층 가정을 순식간에 사회 하층민으로 몰락시켰다.
운이 좋게도 몰락의 대열에서 열외 된 이들은 자신도 언제 몰락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생존본능과도 같아서, 쉽사리 ‘정규직 노동자의 기득권’과 같은 단어로 매도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괜찮은 직장에서 일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개인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가 전반적으로 몰락하는 자들에게 취약하고 다른 대안은 마땅히 존재하고 있지 않으며 다가올 미래가 어떻게 될지 예측하고 계획을 세워나가기엔 불확실성이 너무 커져버린 상태가 훨씬 더 큰 문제가 된다.
사회가 개인들에게 기본적인 복지서비스와 실패에 대한 안전망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곳에서, 사람들은 모든 공적 미덕이 질식당한 협소한 개인주의 속으로 칩거해버린다.(A.토크빌,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 혁명』, p.7) 사회가 개인들을 ‘몰락의 두려움’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개인들은 협소한 개인주의 속에서라도 스스로를 지키려 한다. 하지만 이것이 개인들에게도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협소한 개인주의에 빠지는 것은 당연히 좋은 사회가 아닐 뿐더러, 협력과 연대를 통해 수행되어야 할 수많은 공적인 임무들이 정지하게 됨을 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송호근·홍경준 교수는 『복지국가의 태동: 민주화, 세계화, 그리고 한국의 복지정치(2006)』에서 한국의 복지국가 건설의 가장 큰 난관 중에 하나는 중상층의 ‘연대와 공공성’의 상실에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관련된 내용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정부의 입장은 이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중상층의 소득도 악화될 것이라는 공동체적 위기의식에 입각해 있는데, 중상층은 이 논리를 수용할 여유가 없는 것이 문제다.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장기간 지속되는 경기침체는 중상층의 심리적 관용의 수준을 낮췄고, 또 ‘분배의 평등’에 요구되는 부담증가가 경기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는 이론적 근거를 확보했기 때문이다.”(앞의 책, p.307)
한국의 <최저임금제도>도 이 문제와 복잡·미묘하게 얽혀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최저임금은 시급 4580원으로 맥도날드 빅맥버거 1.2개정도 살 수 있는 수준이다. 이른바, “최저임금의 빅맥지수”라고도 할 수 있는데, 미국의 경우는 최저임금이 7.15달러로 빅맥버거 2.2개를, 일본은 최저임금이 837엔으로 빅맥버거 2.6개를 살 수 있다. 여타 선진국에 비교해보았을 때, 우리나라의 현재 최저임금의 수준은 (빅맥버거 구매력 환산금액으로) 50% 수준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최저임금제도> 주요한 취지 자체가 열심히 일을 하고도 가난에 허우적거리는 이른바 근로빈곤층(working poor)를 구제하는데 있는 만큼, 최저임금 수준으로도 열심히 일한다면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수준으로의 최저임금 현실화(즉, 인상)가 필요한 실정이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면 되는 것처럼 쉬운 일인가? 그것에 반대하는 이들의 목소리에도 마땅히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간단한 질문이지만, 최저임금 인상에 대하여 대기업이 더욱 반대를 할까, 아니면 영세 자영업자들이 더욱 반대를 할까? 정답은 당연히 영세 자영업자들이지 않을까? 왜냐하면 대기업은 이미 피고용인들에 대해서 최저임금 이상의 급여를 지불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반면에 영세 자영업자들은 임금 지불능력이 떨어지고, 이미 노동시장에서 최저임금 수준 혹은 그 이하로 형성되어있는 임금수준에 의존하여 수지타산을 근근이 유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최저임금을 무턱대고 인상하는 것은 우리사회의 중산층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던 영세 자영업자들의 몰락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국 경제와 사회에서 자영업자들이 자리하고 있는 정확한 위치이다. 한국의 취업자 분포는 상당히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는데, 전체 취업인구의 28.8%가 자영업자(2010년 기준)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이는 독일 11.6%, 미국 7.0%와 비교하여도 자영업자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그러한지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괜찮을 일자리를 제공하던 대기업들은 일자리를 줄이고 있고, 실업으로 내몰린 중산층이 대거 자영업으로 배출되었다. 내몰리듯이 자영업으로 쏟아져 나온 이들은 편의점, 치킨, 피자 등과 같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로 하지 않는 서비스업종으로 몰렸고, 이들 영세 자영업자들이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갖고 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값싼 노동력에 의존하여 최소한의 이윤을 겨우 창출하는 수준이다.
왜 그러한지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괜찮을 일자리를 제공하던 대기업들은 일자리를 줄이고 있고, 실업으로 내몰린 중산층이 대거 자영업으로 배출되었다. 내몰리듯이 자영업으로 쏟아져 나온 이들은 편의점, 치킨, 피자 등과 같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로 하지 않는 서비스업종으로 몰렸고, 이들 영세 자영업자들이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갖고 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값싼 노동력에 의존하여 최소한의 이윤을 겨우 창출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이들의 낮은 경쟁력이 과연 자영업자 개개인들의 잘못일까? 그렇지 않다. 정부가 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정책적 노력으로 이들을 자영업으로 유인한 측면이 있다. 정부는 자영업자들의 신규창업을 위해 은행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대출을 알선하는 등의 정책을 펼쳐왔다. 자영업 시장의 과잉과 경쟁력 저하는 한편으로는 정부의 정책적 실패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최저임금의 인상은 ① 최저임금으로 살아가는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으면서도, ② 영세 자영업자들의 몰락을 예방할 수 있는, 나아가 영세 자영업자들도 상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한 가지 정책적 아이디어를 제안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최저임금의 인상을 사업장 규모에 따라 차등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5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에는 최저임금을 매년 10%씩(물가 인상률의 3배) 10년에 걸쳐서 인상토록 하여 구매력 환산으로 OECD 평균치(ex. 빅맥지수 2.0 정도로) 수준으로 이르게 하고, 5인 미만의 영세 자영업자들에 대해서는 그 인상률을 물가인상률의 1.5배 정도로 경감시켜서 점진적으로 인상시키는 방안이다. 그렇게 된다면, 단기적으로는 영세 자영업자들이 대형 할인마트 등에 비해 인건비 측면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고(경쟁상대인 대형 기업형 슈퍼마켓의 인건비 부담이 상대적으로 상승하기 때문에!), 이는 <상생법>이나 <유통법>, <대형 할인마트 주말 휴무제> 등을 통해 영세 자영업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정부의 정책과도 부합될 수 있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모든 고용분야에서의 최저임금 인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청년유니온의 양호경 정책팀장은 “최저임금 인상문제도 결국에는 영세 자영업 사장님들이 피고용자들에게 최저임금 이상의 임금수준을 지불할 수 있는 경제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정책목표와 함께 가야한다.”고 말한다.
<최저임금 인상>과 같이 사회 전반적인 재분배 강화와 양극화 완화, 국내경기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정책은 사회 구성원 다수의 연대의식과 자발적 협력을 얼마나 지혜롭고 설득력 있게 이끌어낼 수 있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특정한 정책의 추진이 ‘지혜롭다’는 것은 그 정책으로 인해 사회 전반적인 공익이 자연스럽게 증대됨을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책의 추진이 ‘설득력 있다’는 것은 정책수행에 필요한 비용의 부담을 최소한 모두가 공평하게, 나아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으로부터 좀 더 많은 기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됨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최저임금>의 현실화와 그 방법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와 건전한 토의를 통해서 정치적 지혜가 모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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